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공연예술계가 뜨겁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라벨의 음악을 녹음한 신보를 발표했고 안느 퐁텐 감독은 라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볼레로: 불멸의 선율'을 내놨다. 한국에서는 지난달 30일부터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라벨의 대표곡 '볼레로'(1928)는 15분마다 지구상 누군가가 듣고 있는 음악이라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의 배경음악, 영화 '밀정'과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도, PC게임에서조차 들을 수 있는 곡이어서 사는 곳이나 세대에 따라 이 음악에 얽힌 추억도 매우 다양할 것이다. 퐁텐 감독은 라벨이 창작한 불멸의 선율이 세상에 어떻게 나왔는지, 탄생의 비화를 영화를 빌어 보여준다.
"나는 머릿 속 음악만 믿어." "당신에겐 키스 대신 음악을 주고 싶어요." 세상 만물이 음악으로 들렸고 연심을 품은 상대에게조차 음악을 선물하고 싶어했던 라벨. 영화는 그의 삶 속에서 볼레로의 탄생에 일조한 여러 명의 뮤즈를 조명한다. 콩쿠르에 수차례 떨어졌던 그에게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준 어머니, 라벨의 음악에서 섹슈얼리티를 발견하고 곡을 의뢰한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 당대 파리의 모든 예술계가 사랑했던 여인 미시아 세르, 스페인 구전가요에서 볼레로의 힌트를 얻게끔 도와준 가정부 르블로 부인 등과의 일화가 흥미롭다.
볼레로의 규칙적인 리듬은 그의 아버지가 일했던 공장의 기계소리에 영향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거의 음악을 완성한 극 중 라벨은 음악을 의뢰한 루빈슈타인을 공장으로 불러 "(볼레로로 무대에 올려질) 발레의 정신은 현대에 바치는 찬가이자 기계 세계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리허설 때 루빈슈타인의 무대를 확인한 라벨은 불같이 화를 낸다. 둥그런 무대 중앙에 선 루빈슈타인과 원을 둘러싼 남성들이 볼레로에 맞춰 에로틱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 악기가 더해지면서 감정이 증폭하는 구조의 음악처럼, 솔로의 춤이 군무까지 이어지는 장면이 조화롭기에 객석은 분노보다는 아름다움을 느낄 법한 장면이다.
루빈슈타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라벨은 그대로 볼레로의 파리 초연 무대를 보러간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모두가 환호했고 항상 자신을 드뷔시와 비교해 평가절하하던 평론가조차 "예전에 짜증났던 당신의 기교주의가 에로틱한 차원으로 발휘됐다"고 말한다. 영화는 역설적으로 완벽주의 천재인 라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결과물이 그를 다시 사랑받게 한 걸작이 된 사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는 볼레로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장르로 변주돼 사랑받는 사실을 그린 영화의 인트로를 환기하게 만든다. 재즈밴드가 연주하고 라틴댄서가 춤을 추고, 학교 체육시간에서 조차 볼레로가 쓰이는 인트로였다. 영화를 중반쯤 보고 나니, 스페인 바스크지방 출신 어머니에게 받은 라벨의 이국적 감성, 미국 투어 중간중간 그가 경험했던 뉴욕의 재즈, 바로크 음악의 재해석 등 다양한 문화와 시간이 볼레로에 공존하고 있다는 걸 은유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볼레로가 사랑받게 된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라벨의 노년이 스크린에 그려진다. 점점 기억력을 잃어가던 그가 볼레로를 들으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음악이다"라며 생각에 잠긴다. 이승의 삶을 끝마친 그가 다시 불멸의 선율을 지휘한다. 영화의 엔딩씬에서는 라벨이 천국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볼레로를 연주한다. 라벨은 동그란 대형의 오케스트라 정중앙에 서서 지휘봉을 흔든다. 볼레로의 멜로디가 울려퍼지면서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알(수석무용수) 출신의 프랑수아 알루가 홀로 춤을 춘다. 루빈슈타인이나 베자르의 관능적인 볼레로와는 달리, 역동적이면서 자유로운 춤사위다. 항상 새롭게 해석되는 볼레로의 생명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퐁텐 감독은 전작 '코코 샤넬'(2009)을 통해 저명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이들의 보편적 고민과 심리를 잘 다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무용수 출신이기도 한 그가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한 발레 '볼레로'(1961)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까지 만든 건 의외의 결심은 아니었을 것 같다. 첨언하면 코코 샤넬의 절친이자 샤넬이 향수를 론칭하게 영감을 줬던 미시아는 라벨의 뮤즈인 미시아와도 동일인물이다. 아마도 미시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라벨이 발견됐을 접점과 그 당시 파리의 예술계를 보여주고 싶었을 지도.
지금도 라벨의 음악은 수많은 안무가들이 재해석하고 싶어하는 원전(origin)과 같은 것이며, 여전히 수많은 무용수들은 라벨의 리듬이 상징적으로 빚어낸 둥그런 무대를 선망한다. 영화는 라벨의 볼레로가 동시대 예술계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단 사실을 계속 시사하고 있다. 러닝타임은 121분.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