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대 추상회화의 흐름을 이끈 화가 마츠모토 요코(90)가 화이트큐브 서울 개인전 <자연의 시선에 놓이다>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1967년 뉴욕에서 접한 미국 색면 회화의 충격을 자신만의 '색채 수묵화' 정서로 승화시킨 화가다.
아흔을 넘겼지만 마츠모토는 여전히 새로운 회화적 영토를 개척하고 있다. 아크릴 물감을 수묵화처럼 그려낸 작품과 더불어 목탄과 유화를 결합한 독창적인 신작을 들고 찾아온 그를 17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나의 머릿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에노구(絵の具·안료, 물감 등)가 나를 움직일 뿐"이라는 그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비교적 늦게 한국을 찾으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 언제 한번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던 차에, 마침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전시를 열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했습니다. 특히 몇 년 전 TV에서 방탄소년단(BTS)을 처음 본 뒤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요. 일곱 멤버가 뿜어내는 신비로운 매력과 훌륭한 패션 감각에 완전히 매료됐죠. 대중문화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게 조금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실제로 한국 땅을 밟고 한국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정말 행복합니다.
▶1967년 뉴욕 방문 당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컬러 필드 페인팅(색면 회화)'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저에게 가장 거대한 충격을 안긴 작가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였습니다. 폴록의 작품을 실물로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인상파의 등장도 혁명이었지만 폴록의 회화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강인함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이자 그야말로 혁명이었죠. 프랑켄탈러 역시 물감을 다루는 독창적인 방식과 정신성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공간감을 보여주었습니다. 뉴욕에서 그 작품들을 보며 이 '감동과 경험을 어떻게든 나의 작업에 녹여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뉴욕에서 돌아온 후, 오랜 시간 고민해온 유화를 버리고 아크릴 물감으로 수십년을 수행하셨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도쿄예술대학 시절 유화를 지겹도록 공부했지만 과연 이 서양의 매체로 평생 나만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늘 회의감이 있었습니다. 제 내면의 뿌리에는 수묵화의 정서가 깊게 깔려 있었거든요. 일본은 본래 기름보다는 '물'에 의해 무언가가 움직이고 표현되는 풍토를 지닌 물의 나라입니다. 뉴욕에서 우연히 아크릴 물감과 가공되지 않은 무명 캔버스를 접했을 때, 수성(水性)이라는 특성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이를 본 순간 흑백의 수묵화를 넘어, 나만의 방식으로 '색채가 있는 수묵화'를 그려보겠다는 다짐이 섰습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으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표 연작 핑크의 초기작들이 소개된다. 요코 마츠모토는 바닥에 앉아 오랜 시간 집중 상태를 유지하며 작업하는 방식을 통해 이 연작을 발전시켰으며 약 30년에 걸쳐 자신만의 회화 언어로 확장해왔다. 작가에게 핑크색은 흑백과 달리 어떠한 관념도 담고 있지 않은 색이자 인간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지만 닿을 수 없는 색이라고 한다.
▶화면에 안개가 낀 듯 얇고 투명하게 색을 쌓아 올리는 헤이지 페인팅(Hazy Painting) 기법으로 유명하십니다. 작업 과정이 매우 격렬하다고 들었는데요.
- 아크릴 물감은 아주 빨리 마릅니다. 이 특성을 살리기 위해 저는 '무조건 하루에 한 점의 대형 작품을 완성한다'는 엄격한 규칙을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 전에는 무조건 끝내야 합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 레이어를 포개어 올려야 하기 때문이죠. 점심을 제대로 차려 먹을 시간도 없어 왼손에 주먹밥을 쥔 채 정신없이 움직입니다. 이 방식은 전 세계에서 아마 저 혼자만 쓰는 기법일 것입니다. 대략 10점을 온 힘을 다해 그려야 마음에 드는 작품 1점을 건질 정도로 실패 확률이 높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나머지 9점은 미련 없이 버립니다.
▶대형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두고 그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작업하시는 모습에서 경건함도 느껴집니다.
- (웃음) 경건한 성직자보다는 서커스 곡예사에 가깝습니다. 워낙 거대한 화면이라 프레임을 딛고 물감 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하니까요. 작업할 때 저는 제 주관적인 감정이나 선입견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제가 계획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캔버스가 저에게 "여기에 블루를, 여기에 화이트를 칠하라"고 거꾸로 명령을 내리는 형태가 됩니다. 그렇기에 이건 무언가를 창작한다기보다 하나의 스포츠 경기 또는 격렬한 퍼포먼스입니다. 머릿속을 완전히 비워둔 채 온몸으로 물감을 마주하는 노동인 셈입니다.
이번 전시의 또다른 축은 절제된 색조의 화이트 연작과 선명한 코발트 블루를 사용한 신작이다. 그에게 색채는 빛과 깊이를 형성하고 캔버스 표면을 변화시키는 회화의 핵심 요소다. 작가는 빛과 어둠은 불가분한 관계여서 아크릴과 유화 작품 모두 빛과 어둠의 교차를 지향한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고수해온 아크릴 대신, 다시 유화로 돌아간 대형 신작들도 선보이셨습니다.
- 지난 30년간 바닥에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온몸으로 액션 페인팅을 했더니 다리와 허리가 모두 망가졌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작업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그동안 바닥에 눕혀두었던 캔버스를 다시 벽에 세워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이후 멀리했던 유화를 다시 마주했죠. 하지만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유화를 만들기 위해 제가 선택한 것이 바로 '목탄(Charcoal)'이었습니다. 다만 60년동안 직관에 기반한, 우연히 색과 형태를 발견하는 작업 방식은 도구가 달라졌다해도 동일합니다.
▶유화 물감에 목탄을 섞는 배합은 매우 이색적입니다. 시판되는 검정색 물감도 전혀 쓰지 않으신다고요.
- 제 물감 상자에는 시판되는 검정 물감이 없습니다. 기성색은 화면의 공기를 차단하고 확장성을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검은색은 수묵화의 먹(墨)처럼 깊은 호흡이 느껴지는 검은색입니다. 이를 위해 울트라마린, 번트 앰버, 가루 목탄과 오일파스텔을 나만의 비율로 배합해 검은색을 제조합니다. 또한 유화 특유의 번들거리는 광택을 지워내고 아주 매트(Matte)한 질감으로 화면을 멈춰 세우고 싶었는데, 목탄과 오일 파스텔을 조합하는 수많은 실험 끝에 마침내 그 답을 찾아냈습니다. 이번 전시장 정면에 걸린 백색과 코발트 블루 연작이 바로 그 결정체입니다.
▶지난 50여 년간 일본 미술계의 극심한 남녀 차별을 견디며 홀로 독창적인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들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과거 일본 미술계는 "여성은 그림을 못 그린다. 시야가 좁다"며 철저하게 여성을 배척했고 저 역시 모진 차별 속에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반면 이번에 마주한 한국은 남녀가 대등하게 소통하고 특히 남성들의 태도가 매우 유연하고 부드러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후배 예술가들에게는 타인의 것을 흉내 내는 정체된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서툴고 비판을 받더라도 오직 나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야 예술가입니다. 관객분들 역시 제 그림 앞에서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마시고, 그저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즐겨주세요. 춤을 추셔도 됩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사진/문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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