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코딩 어시스턴트 ‘커서’를 개발한 미국 AI 스타트업 ‘애니스피어’가 지난 5일, 9억달러(약 1조 2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 가치가 99억달러(약 13조 7000억원)로 평가받고 있다. 설립 3년 만에 이룬 성과로, 자체 개발한 AI모델 없이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AI래퍼(Wrapper)’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또 한번 입증했다는 평가다.
AI 생태계는 크게 인프라와 모델 그리고 AI래퍼가 속한 애플리케이션(응용) 서비스로 구성된다. AI래퍼란 오픈AI사의 거대언어모델(LLM)인 GPT, 구글의 제미나이 같은 외부 AI모델을 불러오고, 그 위에 고객을 위한 기능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AI 서비스다. 자신들만의 특화된 서비스로 기존 AI모델을 ‘감쌌다(Wrap)’는 의미에서 래퍼로 불린다. 예컨대 사용자가 AI모델에 연구 논문을 검색하면 인용 시 자동으로 각주를 달아준다거나 하는 서비스다.
대표적인 AI 래퍼로 ‘퍼플렉시티’를 들 수 있다. GPT, 제미나이 등 외부 AI 모델을 호출해 자체 검색, 문서 요약, 데이터 시각화 기능을 접목한 ‘AI 검색 엔진 서비스’다. 지난 5월 5억달러(약 7000억원)를 투자 유치했고, 기업가치는 140억달러(약 19조 9000억원)로 평가된다. 연간반복매출(ARR)은 2025년 1억 2700만달러(약 1728억원), 2026년에는 6억 5600만달러(약 8843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11월엔 ‘파이낸스’ 기능을 도입해 금융 정보도 실시간으로 제공해주고 사용자들에게 제품 정보를 제공하고 한번에 구매까지 가능한 ‘쇼핑 허브’ 서비스까지 선보이는 등 빅테크들의 전유물인 검색 시장에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PDF.ai’ 도 AI래퍼 기업으로서 성장 중이다. PDF문서를 업로드하면 그것을 요약해주는 것은 물론 사용자가 마치 대화하듯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면 그에 맞춰 PDF 문서를 처리, 분석해준다. 개발자 커뮤니티 'Getlatka'에 따르면 연매출이 2023년 30만 달러(약 4억원)에서 지난해 60만 달러로 두 배 이상 성장했다.
기존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기업보다도 빠른 매출 성장 속도는 AI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국내 한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고객입장에선 AI 모델명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기능이 실제로 잘 작동하느냐가 관건”이라며 “AI 래퍼는 이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 연구소 교수는 AI래퍼를 ‘킬러서비스’라 부르며 “AI 시장 규모가 커지는데 있어서 AI래퍼 기업이 성장하는 것은 긍정적 신호”라고 했다.
시장조사기관 IDC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 AI를 응용한 서비스 시장 규모가 3600억 달러(약 489조원)에 달했고 2027년에는 8000억 달러(1086조원)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에서도 래퍼 전략을 채택한 AI 스타트업들이 늘고 있다. 생성형 AI 콘텐츠 작성 도구를 제공하는 뤼튼테크놀로지스는 외부 AI 모델 위에 글쓰기 전용 인터페이스를 탑재하는 등 에디터 중심 AI 플랫폼으로 성장 중이다. 학술 논문 검색 AI 기업 라이너AI는 외부 모델을 호출하는 래퍼 기업이면서도 메타의 오픈소스 AI 모델 ‘라마(LLaMA)’에 자사 데이터를 적용한 후 정확도를 높인 LLM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라이너AI는 정확도 측면에서 빅테크 AI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 AI모델을 응용해 서비스를 개발하는 국내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올 3월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국내 생성형 AI 스타트업 10곳 중 6곳이 오픈소스 모델을 기반으로 자체 서비스를 개발 중이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