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레즈비언 사장의 좌충우돌 시골 이장 도전기
눈물 대신 똘끼, ‘대의’ 대신 웃음으로
혈관까지 연기하는 양말복·박완규의 연기
혐오 만연한 세상에서 웃으며 싸우는 법 알려줘
이 영화의 개봉관 확대를 기다리는 이유
‘이반리 장만옥’. 제목도 어렵고, 감독과 배우진의 이름도 낯설다. 그런데 이 영화, 웃긴다. 당신이 퀴어든 아니든 말이다. 영화는 ‘오래 두들겨맞아본’ 이들이 알려주는 ‘웃으며 싸우는 맷집’ 그 자체다. 외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 마을을 꿈꾸는 ‘만옥’(양말복)은 관객들을 기어코 ‘해피엔딩’으로 데려간다.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106분이라는 러닝타임은 너무 짧다.
“욕심이 하나 생겼슈. 이 마을서 외로운 사람 없는 거”
‘도시’와 ‘청춘’ 대신 ‘시골’과 ‘중년’이라는 퀴어 무대. 제목에 들어간 ‘이반(二般/異般)’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들은 LGBTQ들이다. 오래 운영해온 자신의 ‘레인보우’ 바가 퀴어축제에서 밀려나며 후배들에게 ‘꼰대 레즈비언’으로 찍힌 채 고향 이반리로 돌아온 만옥.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녀가 자신을 버렸다 여기는 전 남편 ‘철주’(박완규)는 다(多)선 이장이라는 힘을 내세워 온몸으로 그녀를 방해한다.
문턱을 없애달라거나 독거 노인을 보살펴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는 독재적인 이장 아래서 늘 묵살된다. 레즈라며 남학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재연이 학교 선생과 경찰에게조차 부당한 대우를 받자 만옥은 드디어 이장 선거에 나선다.
20년 퀴어 짬밥으로 길러진 강단과 특유의 명랑함, 깊은 공감과 소통력을 지닌 만옥은 편견 가득했던 이반리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철주가 사람들에게 아웃팅하자 영화는 갈등으로 내달린다.
‘이장 선거’라는 가장 토속적이고 일상적인 이벤트를 퀴어 코미디의 무대로 끌어온 점은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선거 유세와 수다, 난장과 소동이 뒤섞인 그 과정에서 부딪히고 얽히던 사람들이 소란스럽고도 다정한 팀플레이를 거쳐 조금씩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국내외 유수 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돼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던 ‘이반리 장만옥’은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중년 퀴어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 이유진 감독은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9) 연출부로 시작, 단편 ‘굿 마더’, ‘나들이’ 등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내밀한 시선과 유머로 탐구해 왔다.
믿고 보는 양말복·박완규 연기에 당사자성 담은 배우들의 연기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로 각종 영화제를 휩쓴 독립영화계 대표 배우 양말복이 중년의 쓸쓸함과 똘끼를 모두 지닌 ‘만옥’을 맡아 대의와 비극 대신 꼰대스러움과 실패담을 장착한 퀴어 캐릭터를 현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연기해낸다.
영화를 통틀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는 바로 철주일 것이다. 갑자기 커밍아웃하며 자신을 떠난 아내 만옥에 대한 애증으로 똘똘 뭉친 그는 마을 이장이자 폐쇄된 시골의 편견을 부풀려 그녀를 공격한다.
연극 ‘붉은 낙엽’으로 제 58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연기상과 제42회 서울연극제 연기상을 수상한 박완규가 만옥의 전 남편 ‘철주’ 역을 맡아 지질하면서도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편견과 권위적인 태도로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려던 그는 자식인 재연이 자신이 불러들인 극우단체에게 공격당하자, 날아차기를 시전한다. 배우 박완규는 보수적인 시선 속에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녀 미워할 수만은 없는, 슬프고 애잔한 K-가족표 코미디까지 입체적으로 연기해낸다.
1세대 트랜스젠더 퍼포머 색자는 만옥의 동료 ‘선아’ 역으로 분해 특별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마을의 편견 속에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가 되고자 하는 10대 ‘재연’ 역을 소화한 성재윤 배우는 온라인 오디션을 통해 참여한 신인.
두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진정성 있게 풀어낸다. 둘 다 연기 경험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캐릭터에서 진정성이 묻어나는 건 바로 이 당사자성 때문일 것이다.
눈물과 절망 대신 유쾌한 연대로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논둑에 나타난 퀴어 트랙터 부대. 무지개 현수막을 든 채 논둑 퍼레이드에 참여한 드랙퀸들. 지역의 퀴어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 갈등과 노인 복지의 사각지대, 학폭을 비롯한 중년 퀴어의 로맨스와 정치까지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갈등 속에서 극중 캐릭터들은 계몽도 비극도 교조적 가르침도 아닌, 충청도 특유의 말맛과 무지개빛 깃발을 든 채 연대한다.
뻔한 행복과 넘치는 해피엔딩이지만 클리셰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만연한 혐오와 미움이 넘치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라도 누구 하나 외롭지 않은 이반리 마을의 행복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들의 마음 한 곳에서 몽글몽글 피어난다.
‘전통’과 ‘폐쇄성’으로 대표되는 이반리 농민들이 다양한 세대의 퀴어 난장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순간은 영화 ‘남태령’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판타지 같은 해피엔딩이지만 ‘동성애 아웃’과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치는 극우 개신교도들처럼 현실에 기반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이 분명히 존재함도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개봉관은 더 확대되어야 한다
만옥은 퀴어 단체에서의 자신의 잃어버린 지위나 고향에서의 자리를 찾는 대신, 오해 받고 괴롭힘 당하는 후배 LGBTQ 재연의 미래를 향해 싸운다. 그리고 그녀를 환영하지 않던 이반리는 가장 차가웠지만 가장 따뜻하게 소수자들을 품어주며, 잊고 있던 전통적인 공동체의 온기를 보여준다. 매드맥스처럼 트랙터를 타고 나타난 드랙퀸과 퀴어 후배들이 보여준 뜨거운 연대와 함께.
영화의 음악을 맡은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은 영화의 온기를 높인다. 영화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를 비롯해 드라마 ‘종이달’, ‘수사반장 1958’ 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던 김사월은 이미 이유진 감독의 여러 단편들에 참여해왔다. 시골 마을 풍경 위로 흐르는 경쾌한 리듬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멜로디는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혐오를 놀이처럼 생산하는 세계를 살고 있는 지금, 영화 ‘이반리 장만옥’은 상처 입히는 세상에 상처를 돌려주는 대신, 웃기고 발랄한 웃음 폭탄으로 서로 외롭지 말자고 말한다. 코미디와 기세로 끌고 가는 판티지의 힘이 세다.
상영관이 몇 개 남지 않았지만 ‘퀴어 영화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이 영화가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는다면 좋겠다. 이반리를 품어 안은 마지막의 무지개처럼, 또 재연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만옥과 선아처럼.
[글 박찬은 기자(park.chaneun@mk.co.kr)]
[사진 (주)인디스토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36호(26.06.3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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