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인베스트먼트- 마켓 데이터
“요즘 주주들은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한 기업 임원의 한탄이다. 주주행동주의의 타깃이 된 국내 기업은 최근 4년 사이 약 6.6배 증가하며 글로벌 23개 주요국 중 3위를 차지했기에 필연적 고민일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도 주주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대상이 된 기업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로 빠르게 늘고 있다. 이 놀라운 변화의 배경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관계, 그리고 한국 시장의 새로운 흐름을 들여다보자.
행동주의 펀드 활동이 확대된 배경에는 2가지 핵심 요인이 있다.
첫째, IT 기술의 민주화다. 스마트폰 하나로 투자 정보부터 주주제안까지 가능해진 시대다. ‘헤이홀더’ 같은 주주행동주의 플랫폼 가입자 수는 2년 만에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개인투자자들이 버튼 몇 번 클릭하는 것만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기업 지배구조에 스며든 셈이다.
둘째,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가치관 변화다. 팬데믹을 겪으며 사람들은 기업의 사회적책임과 인적자본 관리에 더 민감해졌다. 2020년 패스트 패션 기업 ‘Boohoo’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의 절반도 못 받는 현대판 노예 대접을 받는다는 보도가 나오자, 프레이 그룹은 이 이슈를 활용해 지분을 28%까지 확대하는 전략적 행동주의 캠페인을 펼쳤다. 이처럼 환경·사회 이슈가 주주행동주의의 강력한 레버리지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주주행동주의와 ESG는 언뜻 관심사가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주주행동주의는 단기적 주가 상승과 배당 확대에 초점을 맞춘 반면, ESG는 장기적 지속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같은 이분법적 시각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주주제안 중 ESG 관련 안건의 비중이 2018년 25%에서 2023년 41%로 증가했다. 이는 주주들이 단순한 재무적 성과를 넘어 기업의 사회적책임과 지속가능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른바 ‘ESG 행동주의’다. 행동주의 펀드 중 기후 관련 주주제안과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관련 주주제안에 관심을 두는 곳이 급증했다.
엔진 넘버원의 성공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1년 이 작은 헤지펀드는 엑손모빌의 0.02%라는 ‘티끌’ 같은 지분으로 거인을 움직였다. 그들의 무기는? ‘기후변화 대응 실패는 장기적 주주가치 훼손’이라는 논리였다. 블랙록, 뱅가드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의 지지를 얻어 이사회에 3명을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난 2023년 클라이밋 위크에서 ESG 행동주의가 중심 의제로 떠오른 점도 주목해보자.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Say on Climate’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 전략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요구했으며, 기후 관련 ESG 투자 영역에서 지속적인 어젠다로 다루고 있다.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제(SFDR)과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등 규제 강화 흐름은 이러한 투자자 행동주의에 더욱 힘을 보탠다.
한국 시장에도 최근 행동주의 캠페인이 늘면서 ESG 행동주의 관련 캠페인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해 국내 주요 대기업 중 10곳이 ESG 관련 주주제안을 받는 등 글로벌 트렌드와 동행하는 모습이다.
지배구조(G)에서 환경(E), 사회(S) 이슈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최근 기업의 공급망 내 인권문제와 기후변화 대응 전략이 주주행동주의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이는 K-ESG 가이드라인과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의무화 등 관련 규제 환경 변화와 맞물려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주주행동주의와 ESG의 융합은 투자자에게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제공한다. 우선 ESG 퍼포먼스가 우수한 기업은 주주행동주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낮아지므로, ESG 리스크 관리는 투자 포트폴리오 보호를 위한 필수 전략이 되고 있다. 또 ESG 행동주의 성공 사례가 늘면서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ESG 경영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한다.
더불어 투자기관의 87%가 ‘재무성과가 뒷받침된 행동주의 캠페인에 찬성할 수 있다’고 응답한 조사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G가 단순한 윤리적 문제가 아닌 장기적 기업가치의 핵심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ESG 행동주의 캠페인의 성공률은 63%로, 지배구조 관련 캠페인(48%)이나 주주환원 캠페인(58%)보다 높다. 기업의 ESG 성과 개선이 재무적 성과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더블 보텀 라인’ 관점에서 ESG 행동주의는 향후 주류 투자전략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시장 트렌드에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장기적 투자 성과를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섭 KB증권 ESG리서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