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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송유관이 건설된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자유당)와 다니엘 스미스 앨버타 주지사(보수당). 사사건건 대립해 온 정치적 라이벌이 7월 2일 웃으며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앨버타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새로운 ‘서부 해안 송유관’ 건설 계획을 공동 발표하는 자리였죠.이날 발표된 건 앨버타주 북부와 밴쿠버 남쪽 터미널을 잇는 1100㎞가 넘는 대규모 송유관의 신규 건설 프로젝트. 이 파이프라인을 타고 해안으로 수송되는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의 중질유가 유조선을 통해 한국·일본·인도·중국 같은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될 거라고 하죠.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총 352억~437억 캐나다달러(약 38조~47조원)의 건설비용이 투입돼 2034년 완공될 예정.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프라 투자가 될 겁니다.
“우리 발밑에는 9조 달러(약 9660조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석유 매장량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걸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캐나다는 더 이상 10년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다니엘 스미스 앨버타 주지사)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이토록 사이좋게 한목소리를 내며 협력하는 모습이라니. 캐나다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장면입니다. 그것도 연방 탈퇴(독립)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앨버타주인데 말이죠. 이런 국가통합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이 사람일 겁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트럼프가 일깨워준 진실
“역사적으로 캐나다는 무역에서 미국에 매우 끔찍하게(Nasty) 굴었다. 우리는 캐나다의 자동차, 목재, 식품이 필요 없다.”(2025년 1월 24일)2025년 초,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전쟁 첫 타깃이 되어 가장 먼저 관세 폭탄을 얻어맞은 건 오랜 동맹 캐나다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 전면관세 부과를 선포한 뒤 조건부 유예를 찔끔찔끔 반복하는 전술로 캐나다의 양보를 이끌어냈죠. 이 과정에서 캐나다를 향해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는 모욕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는데요.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캐나다산 에너지가 없어도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서, ‘캐나다산 석유 구매 중단’을 협상 카드로 활용했어요. 캐나다산 원유의 약 90%가량이 파이프라인을 타고 미국 중서부와 걸프만의 정유소로 수출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만약 미국이 정말 원유 수입을 중단한다면, 캐나다는 순식간에 판로를 잃게 될 판이니까요.

이를 계기로 캐나다는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가 목줄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미국)에 내줬구나. 이제 캐나다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해야겠구나. 그리고 동시에 의문을 가지게 됐죠. 캐나다는 막대한 석유 자원을 왜 그동안 헐값에 미국에 내준 거지? 왜 우린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던 거지?
안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어차피 제품을 사줄 고객이 한 사람뿐이라면, 가격 결정권을 쥐는 건 판매자가 아니라 고객이겠죠. 캐나다산 원유가 딱 그 꼴이었습니다. 송유관 대부분이 미국으로 연결돼 있다 보니, 생산자는 협상력을 잃었고요. 미국 정유회사가 가격을 거의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었죠. 이로 인해 서부캐나다산원유(WCS) 가격은 서부텍사스산원유(WTI)보다 오랫동안 평균 약 15달러 싸게 팔렸습니다. 파이프라인 병목현상이 심할 땐 할인폭이 배럴당 30달러에 달하기도 했고요.이렇게 할인폭이 크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캐나다 생산자들이 누려야 할 이익을 미국 정유사 마진으로 빼앗겼단 뜻이죠. 캐나다 경제학자 피터 테르타키안은 이를 ‘인질 가격(Hostage Pricing)’이라고 칭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너무 많은 반대와 규제에 시달렸어요. 환경단체 반대는 물론이고,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100개 넘는 원주민 공동체들까지 일일이 설득해야 했죠. 서쪽에선 송유관이 지나가야 하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동쪽에선 새로운 터미널이 건설돼야 하는 퀘백주의 반대가 특히 강경했습니다. 각종 협의와 소송으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건설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요. 한때 100달러가 넘었던 국제 유가마저 2015~2017년 배럴당 50달러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경제성마저 불투명해지자 프로젝트가 엎어진 거죠.
결국 캐나다에서 대형 송유관을 새로 뚫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교훈만 남겼고요. 앨버타주에선 이게 다 연방정부 규제 탓이라며 ‘서부 소외론’이 불붙었습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연방을 탈퇴하자는 분리주의자의 목소리가 커져갔죠.
환경론자 카니의 변심과 승부수
영란은행 총재 출신 금융 엘리트이자 UN 기후변화 특사를 지낸 마크 카니. 2025년 3월 그가 총리로 취임했을 때, 그가 송유관 신규 건설에 나설 거라 기대한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본래 강경 친환경주의자로 명성이 높았고요. 과거 각종 연설과 저서(2021년 출간한 ‘Values’)를 통해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는 좌초자산(Stranded Assets)이 될 것”이라 경고해 온 인물이었으니까요.하지만 그는 취임하자마자 전임 트뤼도 정부 시절의 친환경 정책을 줄줄이 뒤집었어요. 논란 많던 ‘소비자 탄소세’를 폐기했고, 전기자동차 의무화 정책은 보류하고, 2031년까지 20억 그루 나무를 심는다는 계획도 취소했는데요.
갑자기 왜? 일단 2025년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캐나다를 둘러싼 환경은 완전히 바뀌었고요. 그 결과, 자신의 오랜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게 생긴 겁니다. 미국의 압박에 맞서 캐나다가 생존을 위해 자립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것이죠.

그리고 카니 총리는 급기야 앨버타와 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새로운 송유관 건설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까지 성사시켰습니다. 스티븐 길보 환경부 장관이 중간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며 사퇴했을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결정이었는데요.
눈에 띄는 건 이 과정에서 카니 총리가 상당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단 점이죠. 당초 북쪽 해안으로 향하려던 노선을 환경 훼손 적은 남부 노선으로 바꾸고 각종 인프라 투자 선물을 안기면서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의 강경한 반대 여론을 누그러뜨렸고요. 동시에 앨버타주로부터는 세계 최대 탄소 포집·저장 사업에 참여한다는 양보를 이끌어내서 ‘친환경’이란 명분을 얻어냈어요. 또 송유관 통과 길목의 원주민 공동체엔 지분 참여와 수익 분배라는 실질적 보상책을 제시했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부가 송유관 건설을 ‘경제적 독립과 에너지 주권 확보’라는 국가적 과업으로 프레이밍한 덕분에 비판 여론이 잦아들었다는 거죠. 어찌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정치적 방어막이 되어준 셈인데요. 지난해 총리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캐나다인의 67%는 새로운 송유관 건설을 지지하며 반대 의견(24%)을 압도했습니다.
물론 남은 과제는 만만찮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죠. 송유관 건설에 필요한 수십조원 중 90%를 공적자금으로 조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민 부담이 만만찮고요. 과연 송유관 건설이 기대만큼 훗날 높은 수익을 돌려줄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데요. 미국의 압박으로 깨어난 캐나다가 자립을 위해 던진 과감한 승부수. 과연 이게 통할지 이제 전 세계가 지켜봅니다. 어쩌면 활력을 잃어가던 캐나다 경제가 조금은 재미있어질지도 모르겠군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7월 8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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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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