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내려놓고 기도하는 나날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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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한수진의 연주를 들었다. 지난 3월 28일 부산 낙동아트센터에서 열린 오충근 지휘 부산심포니의 공연이었다. 진분홍색 의상의 한수진이 1666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도입부부터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밟는 듯한 연주는 정성을 다한 전력질주였다. 중음역대가 강조됐고, 카덴차가 또렷이 잘 들렸다. 2악장에서 바이올린은 힘을 빼고 노래했다. 연주자 본인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연주였다. 빠른 패시지도 여유 있게 처리했다. 3악장은 전력 질주였다. 묵직한 양감으로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며 해석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서울로 돌아와서 한수진에게 이메일로 질문지를 보냈다. 한수진은 부산 공연에 대해 “악보를 깊이 들여다보며 음악 자체에 충실하려 했다”고 말했다. 특히 멘델스존이 직접 ‘Molto appassionato(매우 열정적으로)’라고 명시한 1악장에서 특유의 끓어오르는 열정의 에너지를 존중했다고 했는데, 겉으로는 유려하고 투명하게 흐르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치열한 감정이 내재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부산 출신 한수진이 오충근 지휘 부산심포니와 5년 만에 조우한 공연이었다.

한수진은 새 홀인 낙동아트센터의 울림과 집중력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부산은 국내 최고 홀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바다와 산이 함께한 부산의 자연은 굉장한 영감을 주죠. 부산에서 클래식 음악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속적인 관계’와 ‘소통’이 중요합니다. 결국 문화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가족’과 같은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깊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음반도 나온다.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비발디 ‘사계’와 피아졸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다. 한수진이 바이올린과 지휘를 겸한 이 음반은 오키드 클래식스 레이블에서 7월 발매 예정이다.

“비발디는 외적인 자연의 풍경, 피아졸라는 계절을 닮은 내면의 풍경을 담아냈어요. 제가 음악 안에서 경험했던 치유의 감각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첫 협연인 잉글리시 체임버 단원들은 음악적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며 함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애비로드 제2스튜디오에서의 작업에서 악장과 수석들이 조정실까지 함께 올라와 음악을 듣고 더 정확한 앙상블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죠.”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한수진은 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8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9세 때 예후디 메뉴인 스쿨, 11세 때 퍼셀 스쿨에서 공부했다. 15세 때인 2001년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린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다.

일찍, 화려하게 부상한 그녀는 어려움을 겪었다. 10대 후반 슬럼프를 맞았고 턱관절 수술 이후 20대 후반 약 6년간 치료의 시간을 보냈다. 콩쿠르 입상 이후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자신과 청중 사이에 유리 벽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고도 했다. 바이올린 거장 이브리 기틀리스의 조언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페스티벌에서 뵀을 때는 ‘어깨 받침을 빼 보라’는 조언해주셨고 이후 옥스퍼드에서도 다양한 경험을 알려주셨어요. 크론베르크에서 기틀리스 선생님 앞에서 연주했었는데 눈물을 흘리시며 ‘요즘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를 위로했다. 너는 음악으로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음악의 본질적 힘을 생각하며 ‘유리 벽’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한수진은 예후디 메뉴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으며 성장했다. 특히 “인간적인 온기와 자유로운 영혼의 호흡이 살아있는”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연주에 깊이 이끌렸다. 음과 음 사이에 머무는 여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펠릭스 안드리옙스키, 자카르 브론, 정경화, 아나 추마첸코 등 스승들에게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깊이를 배웠다. 바이올린 분야 외에도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극적인 표현력이나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의 절제된 시선, 발레리나 다시 버셀의 신체를 통한 완전한 몰입은 음악을 바라보는 한수진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다양한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 머물렀다. 어린 시절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는 바그너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 개념에 매료됐다. 해외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미술관을 찾는다. 익숙한 감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뇌과학과 신경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구체적인 탐구로 이어지고 있다는 그녀는 “언젠가는 예술과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시도해보고 싶다”며 “음악 외의 관심 분야들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며 확장되는 하나의 결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한수진은 올 10월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내한 투어를 준비 중이다. 오케스트라의 20년 만의 방한이고, 관록의 밀도 있는 앙상블로 새 음반의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소속사인 SH아트앤클래식과 “음악이 스스로 말을 걸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가는” 공연들을 기획 중이다. 언제나처럼 1666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함께할 것이다. 이 악기에 대해 “따뜻하면서도 명료한 음색이 돋보이는, 깊이와 투명함이 공존하는 친구와도 같다”며 “저음은 비올라처럼 깊이 있고 고음은 맑고 길게 열리면서 공간을 밝힌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최근 자폐인사랑협회 홍보대사를 맡았다는 한수진은 오늘도 무대에 오르기 전 언제나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음악 앞에서 겸손하고 음악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깁니다. 연주자는 하나의 통로이자 메신저라는 인식 속에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가장 좋은 연주가 나온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김한나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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