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를 외치며 끝없이 자신을 밀어붙인 무용수. 동료와 무대를 향한 존중으로 예술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인물. 강수진의 시간은 결국 한 발레단의 도약으로 이어졌다.
강수진은 세계 최고의 드라마 발레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 꼬박 30년을 춤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컴퍼니의 간판스타로, 적지 않은 영예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선물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캐스팅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주역 무용수들 사이에는 희비가 엇갈린다. 강수진과 함께 춤추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는 무용수가 있는 반면 그의 파트너로 낙점되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댄서도 있다.
“함께 춤출 때면 어찌나 열정적으로 몰입하는지, 나 또한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예요. 수진은 내가 여태껏 춤춰본 파트너 중에서 가장 재능 있고, 열정 넘치고, 재미있는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강수진과 함께 오랫동안 춤췄던 로버트 퇴슬리의 말이다.
리허설 때도 본 공연과 똑같이 연기하고 춤추는 강수진의 엄청난 몰입력과 “한 번만 더”를 외치며 정중하게 부탁하는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니, 파트너의 몸은 매일매일 녹초가 된다. 반면에 강수진의 그런 철저한 사전 연습과 집중력으로 인해 같은 작품이라도 다른 주인공들의 공연보다 훨씬 더 작품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그 힘든 연습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소위 ‘스타’를 꿈꾸는 남성 무용수도 적지 않다.
배역이 결정되고 강수진이 제일 처음 하는 일은 관련 자료를 찾아 탐독하고 자신의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다. 강수진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 줄리엣 역에 발탁된 후 제일 처음 한 일 역시 고국에 있는 아빠에게 한국에서 출판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역서 모두를 사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영화와 오페라로 제작된 비디오 영상을 보면서 공연을 준비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뉴욕 링컨센터 스테이트 시어터에서 공연을 마쳤을 때 까다롭기로 소문난 <뉴욕 타임스>의 비평가는 “강수진만의 줄리엣을 창조해냈다”고 격찬했다. 오랜만에 내한 공연이 이루어져 한국을 찾았을 때도 가족과의 만남은 모든 공연 일정이 끝난 후였다. 공연을 위한 방문이기에 언제나 공연 준비가 최우선이라는 그의 철칙은 3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전막 공연이 끝나고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은 후 무대에서 내려온 강수진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바로 군무 무용수 앞이다. 오늘 훌륭한 춤을 추어줘 고맙다며 예를 갖춰 그들에게 인사한다. 그녀 자신이 7년 동안 군무 무용수로 활동하며 느낀 것은 드라마 발레의 특성상 주인공이 돋보이려면 군무진의 역할이 중요하고, 작품의 전체적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연습량과 철저한 시전 준비. 함께 춤추고, 힘을 합쳐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 스태프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감사해하는 강수진의 프로페셔널 무용수로서의 정신 무장, 그리고 아름답고 따뜻한 감성은 그녀가 왜 월드 스타였는지를 보여준다.
2007년 3월 27일 오전 10시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립극장 캄머탠저린Kammertanzerin(궁중무용) 인증식장. 대상자로 강수진이 호명되었다. 세계적 거장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의 이름도 불렸다.
“20년간 이 극장에 올 때마다 내게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었다. 유럽 나이로 다음 달에 마흔이 되지만 아직도 나는 댄서로서, 젊은 느낌으로 일하고 있다.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춤추었던 무용수, 파트너, 무대 스태프, 안무자와 트레이너, 사랑하는 남편과 한국에 있는 아빠 엄마, 그리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나를 초청해준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발레단에 감사한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내내 그녀의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인증식을 직접 주관한 바덴뷔르템부르크 주정부 문화부 장관은 “주립극장은 옛날에는 궁정극장이었다. 캄머쟁어Kammerzinger와 캄머탠저린Kammertanzerin은 정부가 성악가와 무용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프리마 발레리나라고 해서 다 캄머탠저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상자는 만장일치로 선정된다. 특별하게 뛰어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플라시도 도밍고도 그랬고, 호세 카레라스도 그랬다. 독일 무용이 발전하는 데 기여한 강수진의 공로를 주 정부가 기린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강수진은 세계적 권위의 로잔 국제 무용 콩쿠르 1위 입상, 무용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 수상에 이어 캄머탠저린이란 또 하나의 ‘동양인 최초’ 기록을 더했다. 강수진은 이미 국제 무대에서 동양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로 세계적 무용수의 반열에 올랐다.
강수진이 이날 시상식장에서 흘린 눈물은 갈채를 받는 화려한 스타의 이면에서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겨낸 데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다. 이날 시상식 참석자들이 최고 장인의 반열에 도달한 강수진의 인간 승리에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는 모습은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만큼이나 나를 감동시켰다.
○강수진에 의해 재창조된 드라마 발레의 미학
필자는 강수진이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 발레를 여러 편 보았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해외 공연을 쫓아다니다 보니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본 적도 적지 않다. 드라마 발레의 표본이 된 <예브게니 오네긴>은 안무가 존 크랭코의 대표작이다. 다음은 내한해서 보여준 강수진의 주특기를 다시 소개해본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행동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인물 오네긴과 이런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시골 영주의 딸 타티아나. 여자의 일방적인 연모와 이를 외면하는 남자의 비정함. 강수진의 타티아나는 슬픔과 절망감, 기쁨과 회환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연기력, 주인공의 심리를 담아내는 섬세한 감정 표현과 춤은 물론이고 파트너십도 일품이었다. 강수진은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때론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로 결코 쉽지 않은 크랑코의 안무를 육신으로 녹여냈다. 세 차례의 파드되에서 보여준 강수진과 제이슨 레일리의 앙상블과 감정의 교감은 춤이 얼마나 사람의 감성을 저 깊은 곳으로부터 터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강수진의 타티아나는 드라마 발레가 갖는 가치를 높여주었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강수진이란 무용수로 인해 발레단의 이미지를 더욱 고양시켰다. 그리고 관객은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만들어낸 한 편의 명작 드라마 발레를 눈과 귀, 가슴으로 음미하는 호사를 누렸다.
2002년 1월 30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카멜리아 레이디> 공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남녀의 사랑 얘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화려한 매춘부, 진정한 사랑에 눈뜨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곁을 떠나는 여인의 순애보적 사랑 앞에 관객들은 숨죽였고, 강수진은 현란한 기교와 심연에서 우러나는 내밀한 감정 표현으로 사람들을 울렸다.
특히 3막에서 연인 아르망이 돈으로 사랑을 보상하려 한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절망감, 병든 몸을 추스르며 옛사랑을 회상하는 창백한 눈빛 연기는 섬뜩함을 넘어 온몸을 전율시켰다. 그녀의 순간순간 빛나는 순발력과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어 보였다.
아르망 역 로버트 퇴슬리와 강수진이 보여준 앙상블 역시 세계 정상급이었다. 연속되는 테크닉,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교감,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까지 두 사람의 호흡은 안정돼 있었다. 1막에서는 스타카토식의 끊어지는 동작으로, 2막에서는 밀착한 상태에서 연속되는 고난도 테크닉으로, 3막에서는 템포와 격렬함이 더욱 강화된 움직임으로 차별화한 노이마이어의 2인무 안무를 그들은 눈부시게 소화했다.
강수진이 빼어난 연기와 감정 표현, 거침없는 고난도 테크닉으로 해석한 마르그리트는 <뉴욕 타임스>로부터 호평을 받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티아나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녀가 왜 무용의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자인지를 보여주는 명연이었다.
○강수진과 국립발레단 12년
강수진은 2014년 국립발레단의 제7대 단장 겸 예술감독 취임 이후 12년간 이어온 임기를 마무리하고 2026년 4월 4일 퇴임했다.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과 단장으로 12년 재임 동안 강수진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발레단의 질적 성장이다.
그다음으로는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의 이미지와 그 위상을 크게 높인 것이다. 국립발레단은 최정상 메이저 발레단도 공연하지 못한 존 크랭코, 존 노이마이어의 전막 공연과 장편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확보했다. 존 노이마이어와 이르지 킬리안은 그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무용수로 있을 때 함께 작업했고, 존 크랭코의 안무작들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예술감독이던 레이드 앤더슨이 존 크랭코 재단을 이끌고 있는 데다 강수진이 이 발레단의 간판스타란 점에서 공연 허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강수진에 대한 아티스트로서의 신뢰와 인맥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관객이 거장 안무가들의 대표작을 국립발레단을 통해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수진 예술감독 부임 이후 국립발레단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먼저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단원들에게 여러 유형의 춤을 출 기회를 제공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단원들은 늘 해오던 춤 스타일에서 벗어나 음악을 분석하고,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하고 자신만의 해석이 담긴 춤을 춰야 했다.
클래식발레 작품 외에 드라마 발레, 컨템퍼러리 발레, 신고전주의 발레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확보한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은 어느 유형의 작품이든지 믿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공연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졌다.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의 전막 공연들은 몸을 매개로 하는 발레 예술을 극장 예술의 하나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등급에 의존하지 않고 오디션을 통해 철저히 실력 중심으로 선발한 캐스팅, 그리고 연습 단계부터 리허설까지 이어진 세밀한 준비도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요인이다. 강수진 감독은 수석 무용수, 솔리스트, 드미솔리스트, 군무 등으로 단원들의 등급이 나뉘어 있지만, 새로운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오디션을 통해 주요 배역을 캐스팅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시절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한 <마술피리>, 이르지 킬리안이 안무한 ‘스태핑 그라운드’에 강수진이 주역으로 캐스팅되었을 때도 그녀는 군무 무용수였다.
발레단 연습실과 집을 오가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강수진 예술감독은 그만큼 연습실에서 단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드라마 발레 등 주인공 무용수의 연기력과 캐릭터의 해석력이 필요한 작품의 경우엔 같은 배역을 맡은 경험이 있어 이를 지도해줄 수 있는 별도의 코치를 외국에서 불러와 지도를 맡겼다.
이전에 공연했던 작품과 비교해 훨씬 높아진 국립발레단 공연의 질적 수준은 이 같은 세밀한 부분까지 챙기는 준비 과정이 만들어낸 성과다. <지젤> 2막의 군무, <라 바야데르>에서 보여준 북춤의 안정된 앙상블에 더해, 클래식발레 작품에서 장면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에서도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은 춤은 물론 연기에서도 한 명 한 명이 창의적으로 변신했다.
재임 기간에 단원들의 기량이 얼마나 향상되었고,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그리고 어떤 레퍼토리를 새롭게 확보했느냐가 프로페셔널 컴퍼니 예술감독을 평가하는 핵심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12년을 보낸 강수진이 이룬 성과는 실로 대단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단원들과 함께 보냈고, 외부 활동은 최대한 자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사 구분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강수진은 행정은 사무국장에게 맡기고, 언론사 등을 상대하는 홍보 업무는 해당 부서의 장에게 위임하는 대신 노동조합과 미팅하는 자리에는 꼭 참석해 현안을 들었다. 나이 든 단원들을 방치하지 않고 연관된 다른 직종에서 일할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주는 유연한 리더십으로, 자존감 강한 예술가 100명이 넘는 조직을 12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이끌었다. 발레 예술에 진심이었고, 혼신을 다해 일했으며,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정직한 리더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존 노이마이어는 디테일을 중시하고,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은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며, 존 크랑코의 작품은 혼을 다해 몰입해야 한다.”
강수진이 남긴 이 말은 왜 그녀가 드라마 발레 작품 외에도 세계 최정상 안무가들의 작품을 빛내는 월드 스타 댄서였는지 보여준다.
장광열 무용평론가

3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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