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갈등, 욕망, 감정을 다루는 분석 공간에서 겪는 것들은 그때그때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석가는 피분석자 이야기를 꾸준히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되새깁니다. 서로서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치료적 관계가 굳어지고 분석이 진행됩니다. 경험이 깊고 넓어져서 얻은 깨달음은 무의식을 이해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피분석자는 고유한 존재이고, 경험은 그 사람의 고유성을 존중합니다. 신중한 경험은 분석을 움직이고 성급한 이론은 분석을 박제합니다. 경험은 고유성과 복잡성을 허용하지만 이론은 보편성과 단순성을 고집합니다. 경험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다루면서 이론적인 예측을 뛰어넘습니다.
분석가 머릿속의 이론은 분석 시간에 깨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분석가는 몽상에 잠겨 피분석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긴장하지 않고 풀어진 상태입니다. 이론보다는 직관이 작용합니다. 이론을 활용한 깨달음은 분석 시간이 끝난 뒤에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마음을 비워야 분석 공간이 열립니다. 현대 정신분석에서는 피분석자의 마음과 분석가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제3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두 사람의 무의식이 꿈을 같이 꾸는 경험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석가는 이제 프로이트식 ‘거울’이 아니고 피분석자의 무의식을 느끼고 반응하고 이해하는 살아 있는 ‘도구’입니다.그렇다면 분석 이론은 왜 배우고 적용해야 할까요? 경험에 너무 몰입해서 중립성과 자기 성찰 능력을 지키지 못하면 행동으로 옮겨 경계를 어길 위험이 따릅니다. 풍부한 경험과 이론적 해박함이 잘 섞여서 작동돼야 경계 침범이 아닌 통찰로 이어집니다.
이론은 지도, 나침반입니다. 길과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습니다. 이론은 틀입니다. 경험을 지원하는 틀입니다. 틀이 없으면 경험이 혼돈에 빠지면서 분석이 길을 잃습니다. 지도 없이 하는 여행이 됩니다. 경험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무의식, 저항, 방어, 전이, 역전이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론으로 정립해 개념을 지니고 있어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성과 경계를 유지하면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은 음식이고 이론은 그 음식을 담을 그릇입니다. 음식에 따라 담을 그릇이 달라지듯 경험에 따라 적용할 이론도 달라져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엉뚱한 그릇에 담으면 맛이 없어지듯이 특정 이론에 집착하면 분석 과정이 어긋납니다. 그러니 이론 공부도 필요합니다. 이론은 경험을 해석하고 경험은 이론을 수정합니다. 분석가는 이론과 경험 사이를 오가면서 성장합니다. 경쟁이 아닌 보완 관계입니다. 경험은 구체적이고 이론은 추상적입니다. 경험은 열려 있는 공간이고 이론은 이미 닫힌 공간입니다. 경험은 직관을 허용하지만 이론은 지식에 의존합니다. 경험은 성장 가능성을 열지만 이론은 종속을 의미합니다. 경험은 이론이 제공하기 힘든 미묘함을 제공합니다. 경험은 이론에 반영되고, 이론적 이해는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피분석자가 이야기로 풀어낸 경험은 분석가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분석가에 의해 녹여 낸 경험은 피분석자의 경험으로 새로이 태어납니다.정신분석은 만남의 공간입니다. 피분석자와 분석가의 무의식, 주관성이 서로 만나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내고 공유된 경험이 변화를 불러옵니다. 만남이 원활하지 않으면 분석은 길을 잃어버립니다. 분석 이론은 지도처럼 길을 다시 찾는 데 도움을 줍니다.
분석가는 이론에 매이다 시야가 좁아지는 상황을 피해야 하고, 경험에 빠져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일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론과 경험, 경험과 이론은 늘 같은 팀으로 일해야 합니다. 하나가 실종되면 다른 하나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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