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이후 안보 당국자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탄핵 정국 당시 중국의 선거 개입을 주장하는 반중(反中) 시위와 ‘선거연수원 중국 간첩 99명 체포설’ 등 허위 사실이 확산되면서 이른바 ‘중국 공작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인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극우 세력의 ‘반중 프레임’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중국 공작 위험에 대한 문제의식이 흐려지고 있다는 취지였다.
실제 중국발 공작은 더 대범해지고, 치밀해지고 있다. 올해 중국인과 관련된 안보 사건은 알려진 것만 4건에 달한다. 지난달엔 현역 병사를 포섭해 한미 연합연습 계획 등을 수집한 중국인이 구속됐다. 기밀 수집 과정에 연루된 한국인 중국인이 8명에 달한다고 한다. 안보 당국은 배후에 우리의 합동참모본부 격인 중국군 연합참모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 군무원으로부터 블랙요원 명단 등 군사기밀을 수집했던 중국인은 국가안전부 소속이었다. 중국의 여러 군·정보기관이 우리 국민을 포섭해 전방위적인 공작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민간인을 동원한 중국의 보안 시설 촬영 행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국인 고등학생 2명은 지난달 입국한 지 사흘 만에 한미 군사시설인 오산·청주·평택기지 및 국가중요시설 최고 등급인 인천·제주·김포공항을 누비며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지난해 부산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들은 2년 전부터 군사시설을 찍어온 것으로 드러났다.이들은 ‘단순 호기심’이라고 해명했지만 중국인들의 타깃이 한미 핵심 전력이나 유사시 활용되는 작전 기지에 집중돼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이른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전쟁’ 발발 시 지원 전력이 투입될 수 있는 한미 주요 시설 정보를 수집해 두려는 목적으로 보인다”는 게 안보 당국의 판단이다.
하지만 중국 당국과의 연관성을 확인하고 엄벌하는 근거가 될 법안은 여전히 72년 전에 머물러 있다. ‘적국’, 즉 북한에 한정된 현행 조항을 ‘외국’으로 확대하는 간첩법 개정안이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인 것. 안보와 산업을 망라한 총성 없는 스파이 전쟁이 본격화된 가운데 우리만 국제사회 흐름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대응하는 셈이다. 입국 직후 곧장 사적 헌인릉으로 달려가 국가정보원 건물을 촬영한 중국인에게도 간첩법이 아니라 군사기지법 및 문화유산법 위반 혐의만 적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안보 당국은 온라인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허위 정보를 유포하고, 친중 세력을 양성하며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이른바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이 은밀하게 확대되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 중국은 최근 국내 언론사로 위장한 웹사이트 200여 개를 개설해 허위 정보 공작을 사실상 노골화하고 있다. 2022년 이후 중국 우월주의를 강조하고 ‘남남 갈등’을 조장하는 댓글 부대도 그 활동 규모를 넓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기에 대응할 법적 장치도, 사회 분위기도 마련돼 있지 않다. 중국이 인공지능(AI) 기술까지 활용해 허위 정보를 유포하면서 대만 선거에 개입했던 전례가 한국에서 재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왜곡된 반중 프레임에 휩쓸려 진짜 안보 위협을 외면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신규진 정치부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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