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문화부 차장
55년이 흘러 지난달, 사상계가 계간지로 재창간 1호를 발간하며 돌아왔다.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장준하기념사업회장이 발행인이다. 장 발행인은 “시대정신이 사상계를 부르고 있다”며 “문명과 정치를 비롯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작은 물꼬를 트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작금의 한국이 처한 현실 탓인지 그의 포부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권위주의 시대인 1960, 70년대 창간한 문예지와 1980년대 민주화 물결과 함께 만들어진 계간지들은 시대의 전환기에 한국 사회에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했다. 경영난 등으로 그런 잡지 태반이 사라진 시점에, 사상계의 새삼스러운 복간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기초부터 다시 점검할 때가 됐다는 신호처럼 여겨진다.
사상계 폐간의 결정적 계기는 당대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한 김지하 시인(1941∼2022)의 걸작 ‘五賊(오적)’ 게재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훨씬 난해하고 복합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이를 풀어야 할 정치판에선 여전히 서로를 두고 ‘적(賊)’이라고 손가락질할 뿐이다. 사상계 편집위원을 맡은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재창간호 권두에 게재한 글 ‘다중 문명전환과 한국의 다중정치’에서 “한국에서 정치는 본령을 잃은 채 진영과 인물 사이의 사법 전쟁으로 옮아갔다”면서 “탈진영적 국가 의제의 성취에 계속 실패했다”고 지적했다.후진적 정치가 반복되는 동안 젊은이들은 무한 경쟁에 내몰린 탓에 ‘공동체의 대(代)’가 끊겨 가고 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된 유튜브 콘텐츠 중 하나는 독일 쿠어츠게자크트(Kurzgesagt) 채널의 ‘한국은 끝났다(South Korea is over)’였다. 쉽게 말해 ‘한국은 초저출산으로 이미 망(亡)테크를 탔고, 돌이키기가 극도로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내용이다. 경제활동 인구가 사상 최다인 지금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앞으론 경제와 사회, 문화의 붕괴가 예정돼 있으며, 출산율이 당장 3배로 올라도 고난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건 ‘민주화’ 이후 담론이 힘을 잃은 탓도 있다.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 설국열차를 떠나려면 용기와 함께 상상력이 필요하다. 함의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복간한 사상계는 일단은 ‘생태’와 ‘청년’ 등을 키워드로 잡은 듯하다. 경쟁 압박이 생태적 압력의 수준에 이른 가운데, 무한경쟁 아니면 공동체의 몰락이란 극단적 선택지 말고도 제3의 길이 있다는 걸 사상계가 알려주길 기대한다.
사상계 재창간호 표지엔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시 ‘개미’가 실렸다. “점/점/점/점이 움직인다//점/점점/점점점/점이 점점 많아진다//점들이 모여 메를 이룬다/메가 움직이니, 해도/따라 비춘다”. 개미들이 메(산)를 이루면 태양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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