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김상운]美-유럽 ‘우크라戰 종전안’ 갈등에 불거진 ‘처칠論’

4 weeks ago 18

올 2월 파국으로 끝난 미국-우크라이나 백악관 정상회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가운데)과 J D 밴스 부통령(오른쪽) 사이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흉상이 놓여 있다. 앤디 김 미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장면을 두고 “마치 처칠이 자신이 구축한 미국-유럽 동맹을 트럼프가 무너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사진 출처 앤디 김 스레드 계정

올 2월 파국으로 끝난 미국-우크라이나 백악관 정상회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가운데)과 J D 밴스 부통령(오른쪽) 사이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흉상이 놓여 있다. 앤디 김 미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 장면을 두고 “마치 처칠이 자신이 구축한 미국-유럽 동맹을 트럼프가 무너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사진 출처 앤디 김 스레드 계정

김상운 국제부 차장

김상운 국제부 차장
“유럽 국가들은 모두 ‘윈스턴 처칠’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3월 21일, 스티브 윗코프 미국 백악관 중동특사)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유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건 큰 실수다. ‘처칠’도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이틀 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해법을 놓고 미국과 유럽이 반목하는 가운데 때 아닌 ‘처칠론’이 화두에 올랐다. 구체적인 안보보장 없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떼주고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미국과, 러시아의 재침을 막을 확실한 안보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유럽의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이 소환된 것. 이는 유럽 대륙에서 영토 전쟁이 벌어진 게 2차대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아돌프 히틀러 2차대전 당시 독일 총통으로 치환해보려는 일부 서방진영의 시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논란의 핵심은 침략자의 진의(眞意)다. 다시 말해 히틀러와 푸틴이 품은 진짜 의도 말이다. 1938년 영국, 프랑스와 뮌헨협정을 맺을 당시 히틀러는 체코 주데텐 지방을 요구하며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대(對)나치 유화책을 이끈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의 이 말을 믿고 협정에 서명하며 “유럽 전체가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더 큰 합의의 서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체코 전역을 점령했다. 또 이듬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뮌헨협정은 체코의 35개 전투사단과 군수품 생산이 가능한 스코다 생산공장을 히틀러에게 안겨줘 침략에 날개를 달아줬다.

당시 영국 정치권에서 오직 한 사람이 오래전부터 히틀러의 거짓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처칠은 1935년부터 본격화된 독일의 ‘재무장’ 움직임에 주목하며 히틀러의 군사력 집착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당시 체임벌린과 주류 정치권은 처칠을 한낱 ‘전쟁광’으로 폄하했다. 결국 처칠의 예언이 적중한 건 그가 히틀러의 말이 아닌 ‘행동’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 국면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영구 종전을 정말 원하는지가 핵심이다. 토니 블링컨 전 미 국무장관은 19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추구하는 걸 트럼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에 골몰한 표트르 대제를 롤모델로 삼는 푸틴에게 점령지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으로만 대응하면 제2의 히틀러를 낳을 수 있다고 유럽은 우려한다. 더구나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10년도 안 돼 우크라이나를 다시 침공했다. 유럽이 종전 후에도 러시아의 재침을 우려하며, 평화유지군 파견을 추진하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다르다. 트럼프는 최근 시간을 끌며 휴전협상에 응하지 않은 푸틴에 대해 간간이 실망을 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트럼프는 18일 푸틴과 2시간에 걸친 통화를 마친 직후에도 “나는 푸틴이 전쟁을 멈추길 원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사실 이런 판단은 미국이 바라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악화시키는 대외 무력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원칙이 그것이다. 미국은 종전 후 미군 파견 등을 거부한 채 미국산 무기에 대한 대가를 희토류 등으로 받아내겠다며 최근 우크라이나와 ‘광물협정’을 체결했다.

윗코프는 “유럽은 러시아가 진군할 거라고 보고 처칠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우리에게는 지금 (2차대전 때와 달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있다”고 했다. 나치 독일에 대해 강경책을 펼친 처칠의 방식이 이 시대엔 통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그의 지적대로 2차대전과 지금의 국제질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특정 국가 혹은 지도자의 의도를 파악할 때 말보다 행동을 근거로 삼는 게 안전하다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 지도자의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도 자체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가 푸틴의 말이 아닌, 행동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글로벌 이슈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동아시론

  • 이은화의 미술시간

    이은화의 미술시간

  • 정치를 부탁해

    정치를 부탁해

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