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머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긴장을 고조시켰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최근 영국과 러시아의 전현직 고위 관계자가 서로를 향해 내놓은 발언이다. 두 나라가 교전 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날이 서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올 1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찾았다. 러시아 견제를 위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향후 100년간 두 나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100년 동반자 협정’도 맺었다.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교장관 또한 지난달 초 세르비아, 코소보 등 동유럽 발칸반도 일대를 방문해 역내 국가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발칸반도 내 인종 및 종교 갈등을 부추기고 이로 인한 사회 불안정을 해소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개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 더타임스는 핵미사일을 탑재한 영국의 ‘뱅가드’ 잠수함 4척을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가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비가 영국 해역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러시아와 맞서려면 군사 역량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게 엘우드 전 장관의 주장이다.
반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100년 동반자 협정’ 체결 당시 “우크라이나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려 한다”고 비판했다. 스타머 총리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권력이 유한한데 그들이 물러나면 누가 이 협정을 기억조차 하겠느냐고 조롱했다. 최근 러시아 고위 관계자 3명 또한 로이터통신에 “이제 영국이 모스크바의 주요 적대 세력이 됐다”고 진단했다. 영국이 주요국 최초로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순항미사일과 전차를 지원했고, 우크라이나에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려 하며, 전 세계의 반(反)러시아 여론을 결집시키는 데 앞장선다는 점 등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 중국과의 패권 경쟁 등으로 바쁜 사이 영국과 러시아가 일종의 21세기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내내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인도, 중앙아시아, 극동, 흑해 등 유라시아 전체에서 벌인 각축전이다.
이 갈등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21세기에도 재연되는 모양새다. 두 나라가 당시 가장 격렬하게 대립했던 크림전쟁(1853∼1856년)의 무대가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영토 분쟁지인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그레이트 게임의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희생양이 됐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1885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이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숙적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방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한반도가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후폭풍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북한과 러시아는 모두 북한이 러시아를 돕기 위해 러시아 남서부 쿠르스크주에 군대를 파병했음을 시인했다. 2023년 12월 워싱턴포스트(WP) 또한 그해 한국이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간접 지원한 155mm 포탄의 수가 전 유럽 국가의 공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를 놓고 한국과 북한이 일종의 ‘대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극한 대립에 시달렸으며 국제 정세에도 무지했던 구한말 조선은 오판과 실책을 거듭하며 망국(亡國)의 길로 들어섰다. 강대국 간 패권 다툼에서 희생됐던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 정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국가 차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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