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이 오래간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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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는 봄꽃이 다 지고 난 여름에 비로소 꽃을 피워 100일 넘도록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배롱나무는 봄꽃이 다 지고 난 여름에 비로소 꽃을 피워 100일 넘도록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봄바람이 들판을 어루만질 때마다 새로운 꽃이 피고 진다. 초봄의 산들바람 속에 진달래가 왔다 간 뒤, 늦봄의 남실바람 타고 철쭉이 망울을 터뜨린다. 3월에 피는 진달래는 해가 잘 드는 곳에서 자라고, 잎보다 꽃을 먼저 내민다. 4~5월에 피는 철쭉은 그늘진 곳에서 자라고, 꽃과 잎을 함께 밀어 올린다. 일찍 피는 꽃이 얇고 연한 데 반해 늦게 피는 꽃은 잎이 두껍고 실하다. 생명력이 강하고 향기도 오래간다.

꽃 모양이 작은 호리병을 닮은 병꽃나무는 다른 꽃들이 지고 난 5~6월에 꽃을 피운다. 늦은 만큼 꽃 피는 기간이 길다. 그동안 꽃 색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한다. 음지식물이어서 그늘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해 응달이나 계곡 부근에 산재한다. 목재 또한 화력이 좋아서 옛날에 숯으로 많이 썼다고 한다. 꽃과 나무의 생명력이 모두 강하다.

자랄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람

59세 때 출세작을 발표한 대니얼 디포.

59세 때 출세작을 발표한 대니얼 디포.

여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다. 그중 제일은 배롱나무꽃이다. 7~9월 땡볕에 피는 배롱나무꽃은 한 번 피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석 달 반 이상 가는 비결은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게 아니라 여러 꽃망울이 이어가며 새로 피는 것이다. 아래에서 위까지 꽃이 다 피는 데 몇 달이 걸려서 꽃말이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간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것 같다.

83세 때 대표작 <파우스트>를 완성한 괴테.

83세 때 대표작 <파우스트>를 완성한 괴테.

예부터 “큰 열매를 맺는 꽃은 천천히 늦게 핀다”고 했다.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소설가 이순원 씨의 ‘천천히 피는 꽃’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백일장에 나갔다가 아무 상도 못 받고 돌아와 낙담했는데, 선생님이 운동장 가의 나무 아래로 불러서 들려준 말을 여태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너무 일찍 피는 꽃은 나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나는 네가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조금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자랄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람 말이야.”

‘자랄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란 ‘늦게 피는 꽃’과 ‘오래가는 꽃’의 합성어이기도 하다. 인생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 중에 그런 예가 많다.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예순에 최고 걸작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고, 대니얼 디포는 59세에 출세작 <로빈슨 크루소>를 출간했다. 독일 문호 괴테는 죽기 직전 83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팔순을 넘기면서 성베드로 성당 천장을 어떻게 완성할지 고민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아흔에도 작품 활동을 했다.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살스는 90세에 하루 6시간씩 연습하며 “난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크셰이크 믹서 외판원이던 레이 크록은 53세에 맥도날드를 창업했고, 모건 프리먼은 30년간의 무명 시절을 딛고 58세에 오스카상을 받았다. 68세에 ‘대성당’을 조각한 오귀스트 로댕, 71세에 패션계를 평정한 코코 샤넬, 62세 때 광견병 백신을 발견한 루이 파스퇴르….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조급증’(hurry sickness)에 휘둘리면 늘 허방다리를 짚게 된다. 더 빨리 출세하려고,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더 큰돈을 벌려고 허겁지겁 내달리다 발아래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거꾸러진다. 진정한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가 일을 그르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조급한 야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는 마녀들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조바심으로 왕좌를 탐하다가 던컨 왕을 살해한 뒤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부인은 “당신은 야망이 있으나 그것을 이루려는 악랄함이 부족해요”라며 조급증을 부추긴다. 살인을 통해 왕이 된 그는 자신의 왕위를 위협받을까 봐 더 큰 죄를 저지르고 환각에 시달리며 자멸하고 만다.

'천천히 오래가는' 해법 찾아야

나폴레옹의 몰락도 조급증 때문이었다. 유럽 대부분을 정복한 그는 1812년 러시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겨울이 오기 전 침공을 강행했다. 하지만 물자 보급과 장기 전략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군했다가 혹독한 추위와 게릴라전에 막혀 참패하고 말았다. 6개월 만에 50만 명이 죽고 살아남은 건 10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포병과 기병은 거의 전멸했다. 조급함이 자만과 연결돼 패망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또한 조급증이 낳은 비극이었다. 부통령 출신으로 대통령 재선까지 성공했지만 ‘불법 도청’과 ‘거짓말 파동’으로 1974년 물러나야 했다. 2004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의 ‘반짝스타’ 하워드 딘이 초반 유력 후보로 주목받다가 급격히 추락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낮은 성적을 거두자 조급한 나머지 비명을 지르는 돌발행동을 보이며 스스로 침몰했다.

조급증은 불안과 공포를 수반한다. 사고의 균형을 깨트려 중심을 잃게 한다. 그래서 대의를 망치는 독이요, 자기 발목을 잡는 덫이다. 나라 안팎을 뒤흔들고 있는 정치·경제적 격랑 속에서 모두가 조급함을 벗고 ‘천천히 오래가는’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고두현 시인

고두현 시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에게 맞선 러시아 명장 쿠투조프의 입을 빌려 “진정한 승리를 이끄는 가장 강한 무기는 시간과 인내”라고 말했다. 실존 인물인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의 ‘조급한 파멸’을 지켜보며 ‘느리지만 현명한 전략’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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