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4만달러 벽에 갇혔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4년 국민소득’에 따르면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6624달러로 전년 대비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21년 3만7898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 증가를 반복하고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14년 3만달러에 진입한 뒤 11년째 3만달러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7년 4만달러 벽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4만달러 벽을 넘기 위해서는 친성장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친성장 정책이 실효성 있게 시행되려면 경제 전반의 혁신과 창조적 파괴가 이뤄져야 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올해 1.5%, 내년 1.8% 성장률 전망치를 제시하며 “과거 고도성장에 너무 익숙해 1.8%면 위기라고 하는데 우리 실력이 그 정도”라며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기존 산업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네 분기 연속 성장률이 바닥 수준을 못 벗어난 것은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고갈됐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팽배하다.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은 반도체 의존도만 높아졌을 뿐 지난 20년간 대동소이하다. 중국의 공격적 행보에 밀리고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쳐 위기가 심화했다. 해운, 조선, 철강, 석유화학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저성장은 돌발 변수가 아니라 예상된 쇼크로 볼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 잠재성장률이 1%대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한다. 한은은 지난해 지금 같은 저성장이 지속되면 2040년대 잠재성장률이 1% 이하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발 관세 폭탄이 본격화하는 하반기엔 경제 운영이 더욱 어려워질 소지가 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한국에 군사적 도움을 주는데 관세가 네 배 높아 불공정하다고 비판했다. 수출 의존도가 커 국제 무역 환경이 악화하면 수출 주도 성장이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생산성 제고, 규제 혁파, 정치의 선진화가 시급하다. 2023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51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가운데 26위에 불과하다. OECD 평균 72.9달러에 크게 못 미친다. 생산성 제고는 혁신과 동의어다. 미국 경제의 혁신을 주도하는 엔비디아는 3만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1인당 200만달러가 넘는 생산성을 자랑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대기업”이라고 역설한다. 엔비디아는 높은 생산성으로 경쟁 기업을 압도한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경험한 것은 과도한 규제와 보호로 생산성 저하와 저성장이 고착됐기 때문이다.
규제 혁파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존 코크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통제되지 않은 규제라는 거대한 괴물이 생산성을 갉아먹고 있다고 강조한다. 반도체산업의 핵심 이슈인 주 52시간 규제 예외 하나 개선하지 못하면서 성장 담론을 말하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다. 불량 규제를 없애야 한다. 이상론에 치우친 비현실적 규제가 많아 정책의 실효성을 낮추고 있다. 중복 규제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비슷한 행위에 다수 기관이 중복 규제를 가해 정책 시행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회성이 아니라 상시적인 규제 혁파가 이뤄져야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이 담보될 수 있다.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규제 철폐가 필수 요건이라는 현실 인식이 절실하다.
생산적 정치야말로 한국 경제 명운을 좌우할 핵심 변수다. “경제는 정치가 잠잘 때 성장한다”는 말이 널리 회자된다. 거부 민주주의, 분노와 분열 정치가 경제 성장 동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거부 민주주의는 입법부의 정상적 기능을 훼손하고 정당 간 협치를 어렵게 한다. 분노의 정치는 대화의 장 대신 거리의 정치를 뉴노멀로 만든다. 협상보다 투쟁이 우선시되는 것도 분노 정치의 산물이다. 분열의 정치는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과 대립을 촉진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무력화한다. 과감한 혁신과 강도 높은 구조개혁으로 4만달러 벽을 넘어야 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