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해킹으로 명의도용 대출, 10건중 8건꼴 피해자가 빚 떠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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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방문 않는 비대면 대출 늘면서 신분증-개인정보 악용 사례 속출
“본인 확인 거쳤다”며 은행 책임 면해… 30건중 6건만 피해자 승소 판결
“은행, 본인 추가확인 등 대책 시급”

결혼과 이주 등으로 베트남에서 귀화한 피해자들이 은행으로부터 ‘대출금 5000만 원을 갚으라’는 메시지를 받은 건 2024년경이었다. 해당 은행에 발을 들인 적도 없던 피해자 2명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지인이 신분증 사진을 도용해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개설한 뒤 비대면으로 대출을 받은 상태였다. 명의 도용범은 지난해 6월 컴퓨터 등 사용 사기죄로 징역 5년 6개월이 확정됐다.

이를 토대로 피해자들은 “명의 도용으로 이뤄진 대출은 무효”라며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대구지법 상주지원은 5월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은행으로선 절차대로 본인 확인을 거쳤으니 대출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취지였다. 결국 피해자들은 빌린 적도 없는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 ‘절차는 지켰다’ 판결에 피해자 20%만 구제받아

직접 은행 창구를 방문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비대면 대출이 늘어나면서 해킹이나 보이스피싱 등으로 개인정보가 유출돼 명의를 도용당해도 대출금은 고스란히 피해자가 갚아야 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나온 명의가 도용된 피해자가 제기한 비대면 대출 관련 소송의 판결문 30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가 이긴 경우는 6건(20%)에 불과했다.

지난해 8월 대법원은 보이스피싱범에게 명의를 도용당해 9000만 원의 빚을 진 피해자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휴대전화 해킹으로 얻은 운전면허증, 신분증 사진으로 대출받거나, 휴대전화 대리점 직원이 계약·상담 때 받은 정보를 악용한 사례에서도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피해자들은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거액의 돈을 갚아야 할 처지가 된 것.

법원 판단의 근거는 금융위원회가 2020년 마련한 비대면 실명확인 지침이다. 신분증 사본 제출, 기존 계좌 활용 등 다섯 가지 확인 방법 중 두 가지 이상을 겹쳐 적용하면 된다는 내용이다. 법원은 이를 최소 기준으로 보고, 금융사가 이 절차를 지켰는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

문제는 이 절차로 못 막는 신종 수법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지인이나 가족이 은행을 속여 몰래 대출받거나, 휴대전화에 악성 코드를 심은 뒤 원격으로 조종해 본인 인증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피해자가 이기는 경우는 은행의 기술적 허점이 드러나거나, 최소 절차조차 안 지켰을 때뿐이다. 명의 도용으로 1억2600만 원이 대출된 지모 씨(66)는 해킹범이 신분증을 출력해 다시 촬영한 ‘사본의 사본’으로 인증을 통과한 사실이 드러나 올 2월 간신히 승소했다.● “은행도 책임 나누고 범죄 패턴 감지해야”

소송에서 진 피해자는 은행에 원금과 이자를 그대로 갚아야 한다. 명의 도용범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지만, 갚을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면 회수가 사실상 어렵다. 본인 확인 절차를 지켰다는 이유로 은행은 사실상 책임에서 빠지고,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이 떠안는 구조다.

이런 사례가 늘어나자 불안해진 소비자들은 스스로 예방에 나서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대출이나 계좌 개설이 이뤄지는 걸 막는 ‘여신거래 안심차단 서비스’ 가입자는 2024년 시행 당시 8만 명이었지만,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이후 지난해 5월부터 급증해 올 4월 약 364만 명으로 늘었다.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서비스’ 가입자도 1년 만에 16만 명에서 287만 명으로 늘었다. 두 서비스 모두 거래 중인 금융사 영업점을 방문하거나 은행 애플리케이션에서 무료로 신청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자구책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은행도 명의 도용에 주로 동원되는 휴대전화 회선의 패턴 등을 감지해 추가 본인 확인을 요구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명의 도용 대출의 부담도 함께 져야 한다는 얘기다. 박현근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변호사는 “비대면 대출에 보증보험을 적용하고 은행과 고객이 보험료를 분담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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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현 기자 punch@donga.com
고진영 기자 go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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