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과 무명축구팀 운명적 만남...신개념 '축구동화'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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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지금 영국 축구계는 인구 5만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의 스토리에 열광하고 있다. 주인공은 이름도 생소한 ‘렉섬AFC(Wrexham AFC)’다.

렉섬의 구단주인 영화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가 팀의 승격이 확정되는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기뻐하고 있다, 사진=AFPBBNews
라이언 레이놀즈가 무명의 축구클럽을 인수한 뒤 키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웰컴 투 렉섬’ 포스터. 사진=디즈니플러스

렉섬은 지난 27일(한국시간) 영국 웨일스 렉섬의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에서 열린 찰턴 애슬레틱과 2024~25 리그원(3부리그) 45라운드 홈 경기에서 3-0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승점 89를 기록한 렉섬은 시즌 종료까지 1경기를 남기고 리그 2위를 확정했다. 리그원은 1위와 2위가 다음 시즌 챔피언십(2부리그)으로 승격한다. 렉섬은 이미 우승을 확정 지은 버밍엄 시티(승점 102)와 함께 다음 시즌 챔피언십으로 올라간다.

더 놀라운 것은 렉섬이 불과 2년 전만 해도 5부리그인 내셔널리그에서 경쟁했던 팀이라는 점. 잉글랜드 축구에서 ‘프로’라고 하면 보통 프리미어리그(1부리그), 챔피언십(2부리그), 리그원(3부리그), 리그투(4부리그)까지를 의미한다.

5부리그인 내셔널리그부터는 논 리그라고 부르며 준프로 또는 세미프로로 인정한다. 물론 정식 프로계약을 맺고 뛰는 선수도 있지만, 생업을 하면서 투잡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도 상당수다.

렉섬도 그전까지는 하부리그의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다. 하지만 2023년 4월 내셔널리그 우승으로 리그투에 올라온 렉섬은 지난 시즌 리그투에서 2위를 차지하며 리그원 승격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다시 챔피언십까지 오르는 기적을 일궈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상 잉글랜드 상위 5개 디비전(1~5부)에서 ‘백투백투백’ 승격을 이룬 팀은 렉섬이 최초다. 영국 축구의 새로운 동화를 쓴 셈이다.

렉섬은 1864년 창단해 무려 161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깊은 팀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축구 클럽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에는 2부리그까지 올라온 적도 있다. 하지만 1982시즌 2부 리그에서 21위에 그쳐 강등된 이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5부리그까지 추락하는 신세가 됐다.

렉섬은 영국 웨일스 북부의 작은 소도시다. 인구는 겨우 5만명에 불과하다. 주민 대부분 풍족하지 않은 노동자 계층이다. 팬들의 열정은 여전히 대단했지만, 대도시 연고 팀과 재정적으로 경쟁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2000년대 초반에는 당시 구단주가 클럽과 경기장을 없앨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가까스로 팀의 명맥은 지켰지만, 팀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그런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렉섬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영화 ‘데드풀’로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 라이온 레이놀즈가 새로운 구단주로 나선 것. 레이놀즈는 동료 배우이자 감독, 작가인 롭 매컬헤니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였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를 감명 깊게 본 매컬헤니는 쇠락한 도시의 축구팀을 인수한 뒤 팀과 지역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팬들의 열정은 뜨겁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고 팀을 물색했고 렉섬을 선택했다.

레이놀즈는 처음 제안을 받고 시큰둥했다. 우선 영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웨일즈는 더욱 그랬다. 게다가 축구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캐나다 출신답게 그는 아이스하키 팬이었다. 과거 북미 아이스하키팀은 오타와 시네이터스 인수그룹에 참여하기도 했다.

레이놀즈가 렉섬을 인수할 당시 구단 가치는 38억원에 불과했다. 억만장자인 레이놀즈가 구단주로 나서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유명한 배우이자 영리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통신, 주류,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며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렉섬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놀즈는 중동의 석유 부자들처럼 축구단 운영을 값비싼 취미로 여기지 않았다. 경험 많고 능력있는 전문 경영인을 데려오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손봤다. 뛰어난 감독과 선수도 영입하면서 조금씩 팀을 되살렸다. 경기가 없을 때는 다양한 이벤트도 개최했다. 축구에 실망했던 지역팬들의 가슴에 다시 불이 솟아났다.

이런 모든 과정들은 카메라에 담겼고 ‘웰컴 투 렉섬’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초보 구단주’ 레이놀즈가 무명의 축구팀을 키우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전 세계 팬들이 열광했다. 레이놀즈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프로그램 성공에 큰 몫을 차지했다.

‘웰컴 투 렉섬’은 시즌3까지 성공을 거뒀고 시즌4 방송을 눈앞에 두고 있다, 웨일즈의 작은 시골 마을 렉섬은 이제 전세계 팬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 시즌이 아닐때도 렉섬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구단 가치는 레이놀즈가 인수 하기 전 200만파운드(약 38억원)에서 1억2000만파운드(약 2300억원)로 수직 상승했다. 더이상 레이놀즈가 자기 돈을 쏟아붓지 않아도 유나이티드 항공, HP 등 글로벌 기업들의 후원이 줄을 잇고 있다. 구단 SNS 팔로워 숫자는 300만에 육박한다.

다큐멘터리는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지난해 프라임타임 에미상 리얼리티 부문 5관왕을 차지했다. 빛을 보지 못하고 무명 신세였던 선수들도 유명인사가 됐다. 최근에는 유명 커피 광고를 찍기도 했다.

팀의 간판 공격수 폴 멀린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웨일즈 국기가 그려진 의상을 입은 데드풀이 바로 멀린이었다.

레이놀즈는 렉섬이 챔피언십으로 승격하는 순간 렉섬 홈구장에서 팬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구단주가 되고 나서 첫 기자회견에서 누군가 ‘목표가 뭐냐’라고 물었을 때 ‘프리미어리그’라고 답한 기억이 난다”며 “그때 사람들이 다 웃었다. 웃을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우리는 농담이 아니었다”며 “이제 이곳은 내 집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흥망성쇠의 역사를 넘어 내 감정이 듬뿍 담긴 공간이다”고 축구단과 도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렉섬의 스토리는 21세기 스타일의 신개념 ‘축구동화’로 불릴 만하다.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미디어의 위력과 똑똑한 사업 마인드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 렉섬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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