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빌려주고 수주하는 中, 고부가 선박까지 점령하나

2 weeks ago 6

국내 해운 선사의 중국 자본 의존도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22년만 해도 중국 리스사가 국내 선박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했는데 지난해 31%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국내 민간 은행의 점유율은 13%에서 7%로 낮아졌다. 54%에 달한 국내 정책금융 비중도 27%로 반 토막 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대규모 선박금융 손실 사태를 겪은 시중은행이 선박 금융을 외면하고 있는 데다 국내 대형 조선사가 벌크선 사업을 줄이면서 갈 곳 잃은 중소형 선사가 중국으로 발길을 돌린 결과다.

◇선박금융 맥 끊긴 금융계

돈 빌려주고 수주하는 中, 고부가 선박까지 점령하나

중국이 세계 선박금융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다. 조선·해운 경기 악화로 독일 등 유럽계 선박금융이 크게 위축되자 중국 정부는 조선업을 육성할 기회로 보고 중국 조선소에 발주하는 선주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중국공상은행(ICBC), 상인은행(CMB), 교통은행 등 국책은행이 잇따라 금융 리스사를 설립한 배경이다. 이들은 모회사의 저금리 대출과 신용보증을 등에 업고 90~95%의 담보인정비율(LTV)을 앞세워 글로벌 선박금융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반면 2000년대 초·중반 조선·해운 슈퍼사이클 당시 대규모 선박 펀드를 조성했다가 큰 손실을 본 국내 시중은행은 선박금융 관련 부서와 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수익성 높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집중했다. 그 결과 국내 민간 금융시장에서는 선박금융 전문 인력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국내 대형 조선사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친환경 선박 위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 벌크선을 지을 수 없게 된 중소형 선사들은 척당 500억~1000억원 안팎의 벌크선 발주를 대거 중국 조선소로 돌렸다. 자국에서 건조하면 선가의 95%까지 자금을 빌려주는 중국계 금융 리스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 조선 기술이 발전할수록 중국 정부가 ‘조선-선주-금융’ 패키지 전략을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나마 지난해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중국 건조 선박에 대한 규제를 예고하자 국적 선사들이 선박금융을 국내로 전환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됐지만 이후 미국 측이 규제를 유예하면서 중국 리스사 활용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정책 금융만으로는 역부족

산업통상부는 지난달 13일 이재명 대통령이 울산에서 주재한 ‘K-조선 미래비전 간담회’에서 16조원 규모의 무역·선박금융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시중은행 동참 없이 정책 금융만으로 국내 선박금융 경쟁력을 되살리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일반 투자자 자금을 선박시장으로 유도할 제도적 기반이 사라진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2000년대 초반 도입된 공모형 선박펀드는 배당소득 분리과세 혜택을 앞세워 시중 자금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2015년을 끝으로 조세특례제한법상 선박투자회사 배당소득 분리과세 특례가 일몰됐다. 세제 혜택이 사라지자 자금 조달 유인이 떨어졌고 상장 선박펀드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윤희성 한국해양대 해양금융대학원 교수는 “선박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간 금융사의 대체 상품 개발을 적극 지원하고 분리과세 및 토큰증권(STO)을 확대하는 등 일반 투자자 자금을 끌어들일 제도적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선박금융에 대한 지원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최대 LTV 100%를 제공하는 선주 사업 등을 통해 국적 선사 지원을 이어간다는 방침이지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과 유럽 등 전통 해운 강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책 지원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려 관련 논의조차 지지부진하다.

정희원/정영효 기자 tophee@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