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독한 불심[이준식의 한시 한 수]〈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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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의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전하노니,

꿈속의 밀회로 초 양왕을 유혹한 무산 신녀를 좋아하시나 본데,

불도 닦는 이 몸은 이미 진흙에 적셔진 버들솜,

봄바람 따라 마구잡이로 흩날리진 않는다오.

(寄語東山窈窕娘, 好將幽夢惱襄王. 禪心已作沾泥絮, 不逐春風上下狂.)

―‘즉흥적으로 읊은 절구(구점절구·口占絶句)’ 도잠(道潛·1043∼1106)

시 한 수 읊어주셔요. 한 연회석에서 주빈 격인 스님을 향해 아리따운 아가씨가 부탁인지 유혹인지 추파를 던진다. 스님은 설핏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초 양왕이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신녀(神女)와 밀회를 나눈 사례를 연상했다. 송옥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가씨가 그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지금 그 시늉을 하며 말을 걸어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데 스님의 응수는 결연하다. 유혹이 제아무리 달콤하대도 내 마음은 요지부동. 진흙탕에 빠진 버들솜이 어찌 바람에 흩날리겠는가. 장난삼아 스님의 마음을 슬쩍 집적대 본 여자도, 연회를 마련한 주인도 스님의 돈독한 불심(佛心), 순발력 있는 재치에 탄복했을 게 분명하다. 스님의 방문을 맞은 이는 서주(徐州) 태수로 있던 소동파. 평소 시문으로 교분을 쌓은 터라 동파는 스님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예쁜 가기(歌妓)까지 동원했다. 스님에게 즉흥시를 요청한 게 흥을 돋우려는 가기의 자발적 행동인지, 아니면 스님과 허물없이 지낸 동파가 장난기를 발동해 가기를 부추겼는지는 알 수 없다. 청정수행(淸淨修行)의 고귀한 의지가 누군가의 악취미로 꿈쩍하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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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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