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충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충북 제천은 오래전부터 ‘약초의 도시’라 불렸다. 소백산과 금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남한강이 감싸 안은 분지. 내륙 깊숙이 자리했지만 남한강 물길이 열려 있어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기 좋았다. 이 덕에 약초와 산나물이 잘 자랐고, 대구·영주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약령시로 번성했다. 지금도 약초는 제천 사람들의 밥상과 삶에 깊숙이 스며 있다. 그래서일까. 제천의 음식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녹아 있다. 청풍호의 물빛이 시간마다 달라지듯 제천의 음식도 계절과 재료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여행자는 그 변화를 맛보며 제천을 이해하고, 제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느낀다. 이번 여정은 그 밥상 위에 담긴 제천의 자연과 역사를 따라가는 길이다.
![]() |
제천 청풍호반케이블카와 비봉산 전망대 |
![]() |
충북 제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비봉산전망대까지는 청풍호반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
![]() |
제천 맛집 중 하나인 약채락 성현의 산채비빔밥과 약선불고기 |
청풍호 케이블카 타고 만난 ‘약이 되는 밥상’
제천을 찾는 여행자가 가장 먼저 눈에 담는 풍경은 ‘청풍호’(충주호)다. 충주댐 건설로 생겨난 이 호수는 수몰의 아픔을 간직하면서도 내륙의 바다라 불릴 만큼 웅장하다. 케이블카에 올라 비봉산 전망대에 서면 호수는 햇살과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한다.
그 담백한 물빛은 제천 음식의 성격과 닮아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와 찾은 ‘약채락 성현’의 상차림이 그렇다. ‘약이 되는 채소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처럼, 제천 약초 음식의 상징 같은 집이다. 이번에 맛본 세트A코스에는 한우 떡갈비, 더덕구이, 전식 네 가지, 계절반찬 12가지, 된장찌개, 블루베리솥밥이 차례로 올랐다. 상차림은 소박했지만 그릇마다 제천의 풍토가 담겨 있었다.
숯불 향을 머금은 떡갈비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표고 장아찌와 곁들이니 기름짐이 줄고 담백함이 살아났다. 더덕구이는 씁쓸한 맛 뒤에 은은한 단맛이 남아 술 한 잔을 부르는 맛이었다. 보랏빛 블루베리솥밥은 은근한 과일 향이 피어올라 코끝을 간질였고, 입안에서는 산뜻함과 곡물의 구수함이 어울렸다. 약선불고기전골은 얇게 썬 한우 불고기와 표고·느타리·팽이버섯이 듬뿍 담겨 있었다. 국물은 맑고 담백했지만 은근히 스며든 약재 향이 깊이를 더했다. 한 숟가락 뜨면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충북 제천 금수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정방사 통일 신라시에 건설한 이 사찰은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항상 그자리에 서 있다.
성현에서 금수산 방향으로 차로 십여 분 달리면 ‘정방사 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이 사찰은 천 년의 세월을 버티며 제천 불교문화의 깊이를 전해준다. 정방사 인근의 ‘국립제천치유의숲’에서는 나무 내음이 묻어나는 숲길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늦춘다. 숲의 고요와 바람은 앞서 맛본 약선 음식의 여운을 몸속에서 다시 일깨우는 듯했다.
해가 기울 무렵 찾은 시내의 ‘새터오리촌’은 제천의 저녁을 책임지는 곳이다. 한방오리보쌈, 한방오리누룽지백숙, 한방오리로스구이가 차례로 올랐다. 보쌈은 얇게 썬 오리고기를 배추와 깻잎에 얹고 새콤한 소스를 곁들여 먹는다. 오리의 담백함과 채소의 아삭함이 어울려 입안이 산뜻했다. 백숙은 황금빛 기름이 맺힌 국물이 진했지만 한방 약재 향이 은근해 무겁지 않았다. 고기는 부드럽게 풀렸고, 마지막에 끓여낸 누룽지죽은 고소하고 진해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로스구이는 불판 위 지글거림과 함께 고소한 향이 퍼졌다. 불향과 육즙이 어우러지며 씹을수록 감칠맛이 길게 이어졌다.
![]() |
제천 맛집 중 하나인 새터오리촌의 오리백숙 |
![]() |
제천의 맛집 중 하나인 새터오리촌의 오리수육 |
![]() |
새터오리촌의 오리로스구이 |
다음 날 아침, 발걸음은 ‘장원순대국’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토박이들이 모여드는 이 집은 제천 서민 일상의 상징이다. 뽀얀 국물에 순대와 머릿 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었고 고춧가루를 풀면 칼칼해지고 들깨 가루를 넣으면 구수했다. 순대는 탱탱하면서도 쫀득했고 머릿 고기는 고소하고 담백했다. 속이 든든히 채워지자, 발걸음은 자연스레 배론성지로 이어졌다.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된 곳이다. 초가 성당과 언덕 위 십자가는 고요 속에서 제천이 품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식이 삶을 지탱했다면 이곳은 그 삶을 버티게 한 정신의 근원이었다.
![]() |
제천의 맛집 중 하나인 장원순대국의 순대국 |
![]() |
충북 제천 배론성지 |
천 년 물길 따라 걷는 미식의 압축판
배론성지에서의 고요를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제천의 상징 ‘의림지’다. 신라 진흥왕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저수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천 년 넘게 농업과 사람들의 삶을 지켜왔다. 지금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제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신털이봉과 솔밭공원의 풍경, 저녁 무렵 호수 위 반짝이는 야경, 에코 브릿지에서 바라보는 빛의 흐름은 모두 의림지를 제천의 얼굴로 만들었다.
![]() |
충북 제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의림지 |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의림지 주변은 미식의 중심지가 됐다. 제천시는 이를 살려 ‘가스트로 투어’를 운영한다. ‘먹고 걷고 또 먹는다’는 콘셉트로 해설사와 함께 도보 이동하며 음식을 맛보고 이야기를 듣는다. 공식 코스는 호반식당~커피플러스 제이~다원애~낭만짜장으로 이어지지만, 이번 여정의 첫 방문지는 당초 예정됐던 호반식당이 아닌 의림지떡갈비를 찾았다. 숯불에 구운 떡갈비는 솔잎소금, 표고와사비, 솔잎마늘소스와 어울려 풍미를 더했고, 곁들여 나온 산채비빔밥은 숲의 푸르름을 담아냈다.
![]() |
충북 제천의 의림지가스트로 투어 코스 중 하나인 카페 다원애의 쌍화차 |
전통찻집 ‘다원애’에서는 18가지 한약재로 달인 궁중 쌍화차를 맛보았다. 도기 뚝배기에서 끓어오르는 쌍화차는 구수하면서도 은근한 단맛을 남겼다. 호수변 카페 ‘커피플러스 제이’에서는 드립커피의 깔끔하고 깊은 향에 잠시 쉬어갔다. 여기에 은근하게 기분좋은 디저트의 단맛이 여유를 더했다. 마지막 코스인 ‘낭만짜장’은 굵은 면발과 진한 소스가 어우러진 쟁반짜장이 인기 메뉴다. 여기에 크림소스 탕수육의 고소한 풍미는 평범한 중식을 넘어선 맛이었다.
청풍호의 물빛과 의림지의 고요처럼 제천의 밥상은 절제 속의 풍요를 보여준다. 풍경을 따라 걷다 보면 음식이 나오고, 음식을 맛보다 보면 제천의 역사가 떠오른다. 제천의 미식은 그렇게 여행자의 기억 속에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 |
충북 제천 가스트로투어 의림지A코스 중 하나인 낭만짜장의 쟁반짜장과 크림소스탕수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