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데일리 권효중 김은비 기자] 소비경기가 둔화하고 건설업이 침체하는 등 내수 부진이 장기화하며 새 정부에서 재정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2년간의 대규모 ‘세수 펑크’에 더해 올해도 미국 트럼프발 관세 충격, 이에 따른 수출 타격 등으로 내년까지의 세수 전망이 밝지 않은 만큼 무조건 재정에 기대기 어렵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온다.
전문가들은 재정에 대한 요구가 큰 만큼 재정 지출과 함께 조세 지출까지 합리적인 기준을 세워 재정립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새 정부는 장기적인 재정 ‘기초 체력’을 닦는 한편 재정준칙 등 명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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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
추경에 악화되는 재정 건전성…“재정 확대엔 원칙 필요”
7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추가경정예산(추경)안 13조 8000억원이 확정됨에 따라 올해 본예산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은 2.8%에서 3.3%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첫해인 2022년(-5.4%)은 물론 △2023년(-3.9%) △2024년(-4.1%)에 이어 올해도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3% 이내’라는 재정준칙의 목표를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재정 건전성이 악화했음에도 경기 침체 우려 등을 고려할 때 새 정부 들어서도 최소 2~3차례 추가 추경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만큼 재정에 대한 소요가 커졌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시적으로 하반기에는 확장 재정이 필요할 것”이라며 “내수 침체가 심각하고, 성장률 둔화 충격이 큰 만큼 보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이어 김 교수는 “일회성의 ‘나눠주기’식이 아닌, 내수와 밀접한 건설 보강·고용을 늘리는 등 장기적으로 ‘잘 쓸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대부분 공감하지만, 장기적인 건전성 관리가 필수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김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꼭 필요한 데에 써야 하는 것이 재정이지, 막 푼다고 성장률이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역시 “재정 역할이 커진 만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하고, 세원 확충 노력도 수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혁파 등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단순히 금리를 낮추거나 재정을 풀어서 지금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며 “현재 투자가 어렵고, 건설 경기가 최악으로 치닫는 등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투기·물가 상승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경제 활력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풀고, 대내외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협상력 확충 등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조세지출 합리화…“장기적 건전재정 합의 이뤄져야”
장기적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재정 지출 효율화가 급선무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해 앞으로 복지 등 필수 지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민간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민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불필요한 지출을 점검·축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범 교수도 “현재 논의되는 연금개혁도 모수개혁 이상이 필요하다”며 “기초연금 등 다른 연금 체계와 통합하는 등 복지 지출 전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지난해에만 71조 4000억원에 달했던 조세 지출을 줄여나가는 것도 필수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국세감면율은 16.3%로 2023년(15.8%) 대비 0.5%포인트 올랐고, 올해는 15.9%로 예상돼 3년 연속 법정 한도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올해는 105개 조세 지출 항목이 일몰을 맞아 연간 감면액이 300억원 이상인 항목 23개에 대해선 의무 심층 평가가 진행된다. 다만 2015년 이후 109건의 의무 심층 평가 항목 중 실제 폐기까지 이어진 경우는 6건에 불과한 만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김우철 교수는 “개별 세목을 보면 ‘이유 없는 감면’은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폐지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며 “조세 지출의 총액 한도를 정해놓고, 의도와 달리 방만하게 운영된다면 그 우선순위를 살펴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용카드 세액공제 등 이미 목적을 달성한 항목들은 폐지하고, 혁신 촉진·경쟁력 제고라는 목적에 맞춰 정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상황을 고려해 유류세 할인 등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상범 교수는 “일몰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조특법(조세특례제한법)상 조항들은 물론, 최근 물가가 안정화되고 있는 만큼 유류세 등은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유명무실해진 재정준칙을 확립, 앞으로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새 정부 들어 ‘사회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재정 소모가 불가피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김우철 교수는 “경기 침체기 등에 한해 예외 조항을 두되, 평상시에는 적자 관리를 위한 원칙은 필수적”이라고 했다. 양 교수 역시 “지금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향후 5~10년에 ‘건전 재정’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 재정준칙 법제화가 가능하다”며 “우리 경제도 고성장 시기를 벗어난 만큼 앞으로의 재정 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