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만 생각하다 자본주의 망각’
최회장 발언에 기업거버넌스포럼 반박
주주권익 보호·이사회 독립성 등 강조
N%성과급도 주주 잔여가치 훼손우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의 ‘자본주의 위기론’이 주주가치와 기업지배구조를 둘러싼 논쟁으로 번졌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성장 기업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요구하기에 앞서 주주권익 보호와 이사회 독립성 등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부터 지켜야 한다며 최 회장의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20일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최태원 회장의 위험한 자본주의의 이해’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우수한 인적자원을 갖춘 대한민국에서 사업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주주권익 보호와 이사회 독립성, 합리적인 자본배치라는 자본주의 원칙부터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최 회장이 지난 15일 제주에서 열린 제49회 대한상의 하계포럼 기자간담회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과거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성장정책 강화를 주문한 데 대한 반박이다.
당시 최 회장은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시스템과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성장을 못 하고 한쪽 바퀴가 돌아가지 않으니 민주주의에도 문제가 생긴다”며 “성장이 이뤄져야 분배 문제를 해결할 여유도 생긴다”고 말했다.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지만 실제로 성장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제도는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거버넌스포럼은 성장의 필요성 자체보다 성장에 필요한 자본을 누가 결정하고, 그 성과와 위험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가 핵심이라고 맞섰다. 기업 지원 확대에 앞서 개별 회사의 이사회가 전체 주주의 이익을 기준으로 투자와 자금조달 방식을 결정하는 구조부터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논쟁의 중심에는 SK하이닉스의 비수도권 반도체 생산법인 설립 가능성이 놓였다.
현재 지주회사 체제에서는 손자회사가 증손회사를 설립할 때 원칙적으로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은 비수도권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비수도권 증손회사에 대해서는 손자회사의 의무 보유 지분율을 50%까지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장은 제도 개편을 활용해 SK하이닉스가 별도 생산법인을 세우고 외부자본을 유치할 경우 기존 주주의 반도체 사업 노출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SK하이닉스가 직접 투자하면 신규 사업에서 발생하는 성과가 기존 주주에게 귀속되지만 외부 투자자가 참여한 별도 법인으로 사업을 추진하면 성장 과실의 일부가 외부로 이전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SK하이닉스 이사회가 외부자금 수혈을 명목으로 호남 지역 반도체 생산법인에 대한 외부출자를 승인한다면 2022년 LG에너지솔루션 상장 논란이 반복될 수 있다”며 “반도체 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책적 명분과 별개로 기존 주주의 가치가 희석되는 구조인지 철저히 따져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SK하이닉스의 미국예탁주식(ADS) 상장 직후 증손회사 설립 가능성이 제기된 점도 문제로 꼽았다. 해외 투자자의 접근성을 높여 기업가치 재평가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핵심 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해 외부출자를 받는다면 자본시장에 상충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거버넌스포럼은 이번 사안을 SK하이닉스의 투자 방식에 국한하지 않고 SK그룹 전반의 의사결정 구조와 연결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기준 SK그룹 계열사는 2024년 5월 219개로 집계됐다. 이 회장은 다수 계열사를 하나의 그룹 전략 아래 운영하는 이른바 선단식 경영이 개별 회사 이사회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자본배치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열사별 이사회가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 인수합병(M&A), 배당과 자기주식 소각 등을 독립적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국내 대기업집단에서는 그룹 차원의 판단이 개별 상장사의 이해관계에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구조가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전체의 생산성과 잠재성장률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봤다.
피라미드형 소유구조도 비판 대상에 올랐다. 지배주주가 최상위 회사를 통해 자회사와 손자회사를 연쇄적으로 지배하면 실제 출자한 자본보다 훨씬 큰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과 지배권의 괴리가 커지고 개별 상장사의 일반주주보다 그룹 전체의 이해관계가 우선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은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주식을 직접 보유하지 않고 이사회 구성원도 아니면서 대규모 투자계획을 먼저 공개한 점도 문제 삼았다. 논평에 따르면 최 회장이 발표한 1100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은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의 74%에 해당한다.
이 회장은 이처럼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투자계획이라면 투자 규모와 집행 시기, 재원 조달 방식, 예상 수익률을 SK하이닉스 이사회가 먼저 검토하고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룹 총수가 계획을 먼저 발표하고 이사회가 사후적으로 이를 추인하는 구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에 대해서도 최 회장과 상반된 진단을 내놨다. 기업 지원 제도의 부족보다 지배주주와 그룹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가 국내 상장사의 가치평가를 낮추는 근본적인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SK하이닉스가 ADS를 발행해 해외 투자자의 접근성을 높이더라도 이사회 독립성과 의사결정의 투명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기업가치 할인 해소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상장 시장을 넓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모든 주주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주요 의사결정을 전체 주주의 이익에 맞춰 내리는 거버넌스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SK하이닉스 노사가 합의한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도 비판 대상에 포함됐다. SK하이닉스 노사는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사용하되 별도의 상한을 두지 않는 방안에 합의했다.
거버넌스포럼은 주주가 임금과 세금, 채무 등 계약상 청구권을 충족한 뒤 남는 기업의 잔여가치에 대한 최종 청구권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상한 없이 임직원에게 배분하면 사업 위험을 최종적으로 부담하는 주주의 몫과 균형을 이루는지 이사회가 따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도체 산업은 호황기에 대규모 이익을 내지만 불황기에는 천문학적인 설비투자 부담과 실적 악화를 감수해야 하는 대표적인 자본집약 산업이다. 경영환경이 나빠져도 임금과 채권자의 원리금은 우선 지급되는 반면 주주는 주가 하락과 배당 감소를 통해 손실을 부담한다.
이 회장은 “기업의 자본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는 그룹 총수나 정부가 아니라 개별 기업의 이사회”라며 “설비투자와 R&D, M&A 등 미래 성장 투자와 배당, 자기주식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의 최적 조합을 전체 주주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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