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책을 사랑하는 배우였다.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을 처음 낸 게 2016년.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운영하던 독립서점은 그가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사바하', '타짜:원 아이드 잭' 등 주연 배우로 발돋움한 후에도 영업을 이어갔고, 코로나19가 덮친 2021년 6월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출판사 무제는 그보다 조금 앞선 2020년 문을 열었다.
이미 여러 번 영화배우 박정민으로 마주했지만, 이번엔 무제의 대표로 그를 만났다. "올해 안에 제가 없어도 출판사가 운영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그는 "차가 막히기 전에 출발해 7시쯤 사무실에 도착해서 밤 12시쯤 퇴근하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며 "출퇴근하는 분들의 업무 시간에 맞춰 소통하고, 6시 이후에는 제가 작성해야 하는 서류들, 써야 하는 글들, 유튜브 편집과 인스타그램 정리, 홍보 콘텐츠 등을 기획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최근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시작인 '첫 여름, 완주' 출간 소식을 전하면서 직접 보낸 보도자료로 화제가 된 박정민에게 "출판사를 운영하는지는 몰랐다"고 인사를 건네자, "처음 시작한 건 4~5년 전인데 그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4~5년 만에 각성한 이유를 묻자 "원고가 도착했다"면서 "이젠 해야 했다"면서 웃었다.
"'첫 여름, 완주'를 써 주신 김금희 작가님에게 저희의 첫 책 '살리는 일' 추천사를 요청했어요. 작가님과 친분이 있던 건 아니고, 소속된 회사로 연락을 드렸고, 이후 기획안을 보내고, 신간 출판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그 원고가 거의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았죠. 그즈음 박소영 작가가 동생이랑 쓴다는 '자매일기' 원고도 받았고요.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시는 건데, 걱정되는 지점이 있으셨을 거예요. 작가님 책을 많이 팔아드려야 하고, 홍보도 열심히 해야 해서 이제야 드러내게 됐습니다."
책 홍보뿐 아니라 무제라는 출판사가 갖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다는 박정민은 최근 브랜딩 마케팅 전문가를 직원으로 "절치부심해서 채용했다"고 했다. 무제를 통해 "소외된 존재와 이야기를 다루지만, 메시지에 재미가 함몰되지 않는 책을 선보이고 싶다"는 박정민은 듣는 소설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시작은 충동적이었어요. 책방을 운영하며 책의 유통 과정을 조금 알았다고 무턱대고 덤벼들었죠.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원고가 올 텐데, 뭘 해야 하냐'면서 하나하나 물어봤어요. 일단 편집자가 교정이랑 교열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이너도 있어야 하고, 서점 물류업체와 계약도 해야 한다고 하고요. 보도자료도 돌리고, 서점 MD도 찾아가고, 뭐가 많았어요. '그냥 서점에 갖다주면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계약할 때 돈을 어떻게 나눌 건 지, 정가를 어떻게 정하는지도 몰라서 첫 책을 만들 땐 그냥 주는 대로 받고, 주라는 대로 주고 그랬어요."
월세 30만원 사무실에 컴퓨터 한대를 놓고 시작한 출판사는 2020년 12월 박소영 작가의 동물권 에세이 '살리는 일'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후, 지난해 8월 박 작가가 동생 박수영 작가가 함께 쓴 '자매일기'를 출간했다. 이번에 선보인 '첫 여름, 완주'는 무제의 세번째 작품이다. 처음부터 듣는 소설로 기획됐고, 박정민이 직접 배우들을 섭외해 녹음 디렉팅을 한 후 세상에 나왔다.
처음 출판사를 열었을 땐 사비를 털어서 했다면, "제대로 운영하자"고 마음먹은 후 "일정 투자금을 넣고, 그 돈으로만 꼼꼼하게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첫 여름, 완주'를 위한 배우 섭외도 사적으로 개개인에게 연락하는 게 아닌, 회사를 통해 제안하고, 스케줄을 조율하며 '정석대로' 했다는 설명이다. '첫 여름, 완주' 녹음에는 배우 고민시, 김도훈, 염정아, 최양락, 김의성, 박준면, 배성우, 류현경, 김준한, 주인영, 임성재 등이 참여했다.
"배우들에게 매니저 번호를 물어보고, 그분들에게 하나하나 허락받았어요. '한번 해줘' 하는 건 후지니까. 보도자료를 낼 때도 하나하나 프로필 사진도 받고, 컨펌받았어요. 다행히 협조적이라 제가 하면서 힘든 건 없었어요. 그분들은 불편하셨을 수 있죠. '그냥 알아서 해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맞으니까요."
시작은 영세하고, 주먹구구식이었지만 "한번 하고 나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계산이 선다"며 "일정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녹음도 시간 되는대로 와서 하다 보니 배우들을 불편하게 한 것도 있는데, 영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이런 것들을 다 정리하듯 책을 낼 때도 사전에 계획을 잘 짜야겠다 싶더라"며 다음을 생각하는 박정민이었다.
그러면서 "불편한 환경이었지만, 좋은 배우들이 와서 기가 막히게 나왔다"며 "일반 오디오북과 다르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분들의 표정과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첫 여름, 완주' 홍보를 이어갔다.
"녹음만 두달, 편집엔 8개월이 걸렸어요. 구름, 윤마치 두 음악감독님도 재능기부로 참여하셨는데, 그 음악만 서른곡 정도 돼요. 오디오북이라 명명됐지만, 한편의 영화라 생각하고 접근했어요. 이 책을 다 듣고 나면,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화면이 없는 영화처럼 만들려했죠."
'첫 여름, 완주'는 지난달 국립 장애인 도서관에 우선 기증돼 시각장애인들을 첫 독자로 모시고, 이달 중 비장애인 독자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아직 출판사가 수익을 내지 못해 박정민은 "월급도 안 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그는 "이 책으로 복을 받았다"며 "'첫 여름, 완주'로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고, 앞으로 더 의미 있는 걸 시도할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도 문제를 통해 의미 있는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앞서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밀수'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화면해설이 들어간 '배리어프리(Barrier-Free)'로 제작되자 사비를 털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상영관 초대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무제가 듣는 소설 프로젝트를 이어가겠다고 밝히면서 앞으로도 시각장애인 공헌 사업 등을 이어가는지 이목이 쏠렸다.
박정민은 "사명감까진 아니다"고 겸손함을 보이면서도 "유독 거절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거절하더라도 마음이 쓰이고, 웬만하면 다 하고 싶다"면서 남다르게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그냥 개인적인 이유예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눈이 불편하다는 것에 큰 생각이 없었는데, 책을 만들다 보니 '어떻게 보여드려야 하나'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영화야 화면도 크고, 소리도 있는데 책은 볼 수 없으니까요. 제가 하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끔 선물을 드리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하고 싶고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박정민은 유튜브 콘텐츠도 제작해 올리고, 수첩과 만년필 등 굿즈도 제작해서 판매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 '힙'한 행보를 이어가는 셈이다. 유튜브 채널은 개설한 지 4개월 정도이지만 이미 구독자 수도 2만명을 넘겼다. 독서 콘셉트 유튜브 채널 중 가장 유명하다는 민음사TV가 30만명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렇지만 독자들과 다양한 소통을 계획하면서도 "내 책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첫 에세이 '쓸만한 인간'에 쓴 내용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소하게 논란이 된 것에 대해 "전 제 생각을 나열한 건데, 이게 책으로 나와 누군가가 읽히면 그 사람의 기준으로 해석이 되고, 거기에서 제 실수가 발견된다"며 "10년 전에 나온 책이 지금까지 저를 괴롭힌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전업 작가라면 괜찮은데, 전 본업이 있고, 제 실수가 저의 본업에,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더라고요. 만약 그런 상황이 또 생긴다면, 전 출판사까지 다 때려치울 생각까지 있어요. 그래서 더 안 쓰게 되더라고요. 10년 전에 제가 쓴 글로 지금의 제가 평가받는 데, 이걸 다시 써서 새롭게 기억 시키거나, 다 없애버려야 하는데 둘 다 불가능한 거 같고요. 언젠가 쓸 수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서로 싸우거나 논쟁하고 싶진 않아요. 개인적으로 몰래 일기는 쓰지만, 아무도 보여주지 않을 겁니다. 죽기 전에 다 태워버릴 거예요.(웃음)"
연기자라는 정체성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출판사라는 새로운 업에 대해 진심으로 임하는 박정민이었다. "우리 회사의 재산은 제가 15년간 꾸역꾸역 쌓아온 인지도"라고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이것도 일회성이고, 결국에는 콘텐츠로 보여줘야 한다"면서 앞으로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칠(Chill)'하고 '힙(Hip)'한 행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파주 출판단지에 작은 건물을 얻어 입성하는 게 목표에요.(웃음) 거기에서 외주를 주지 않고, 우리끼리 책을 만드는 그날이 오길, 소박하게 바라봅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