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26번째 피아노 소나타에 해당하는 Op.81a '고별(Lebewohl)'은 베토벤의 소나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작곡가 자신이 직접 (그의 제6번 교향곡 '전원'의 경우와 같이) 각 악장에 '고별'(1악장), '부재'(2악장), '재회'(3악장) 등과 같은 표제적 제목을 붙인 작품입니다.
원래 1악장의 첫 스케치에는 베토벤이 'abschied(이별)'이라고 기재하였지만 나중에 이를 'Lebewohl'로 바꾸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헤어지는 사람에게 건네는 "잘살아~" 또는 "안녕~" 등과 같은 뜻을 지닌 독일어 인사말로 이 피아노 소나타의 타이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과 관련하여서는 특이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출판 시 출판업자가 이 독일어 인사말 "Lebewohl"을 프랑스식 인사말인 "Les adieux"로 바꾸자 베토벤은 프랑스식 인사말인 아듀(adieux)와는 달리 독일어 "Lebewohl"은 아주 소중한 한 사람을 향한 인사말이므로 그렇게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출판사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Lebewohl"이 향한 그 "아주 소중한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베토벤이 나중에 이 작품을 그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며 이 작품을 그와 연관시키는 헌정사를 기재하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이 당시 전쟁 통에 비엔나를 떠났던 루돌프 대공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그를 그리워하며 이 작품을 작곡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베토벤의 스케치를 연구한 학자 버슈타인에 의해 이 작품이 루돌프 대공이 비엔나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1악장이 착상되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 작품이 처음부터 루돌프 대공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쓴 작품이라는 종래의 설명에 큰 의문이 던져졌습니다.
그렇다면 베토벤은 도대체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고별 소나타를 착상한 것일까요? 버슈타인은 다소 엉뚱하게도 이 작품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시키며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위한 작품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베토벤이 뜨겁게 사랑했던 요제피네가 베토벤에게 '작별'을 고한 후 이 작품이 착상될 당시에는 아이들의 보딩 스쿨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언니와 함께 (루돌프 대공의 경우와 달리) 이미 장기 여행을 떠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피아노 소나타의 핵심 소재인 '이별의 동기'는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현악사중주 '하프'에서 요제피네에게 선물한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와 함께 차용되었고, 그 후 베토벤이 요제피네와 재회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1812년에 작곡된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역시 (1악장에서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를 차용함과 더불어) 2악장에서 이 피아노 소나타의 '이별의 동기'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이 피아노 소나타 '고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가 여러 악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래 베토벤이 그 안단테 파보리를 2악장으로 하여 작곡하였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3악장의 핵심 동기도 차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음악적 내용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은 애당초 요제피네를 염두에 두고 착상이 되었으나 나중에 베토벤이 자신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을 챙기기 위하여 이 작품을 그에게 헌정하는 과정에서 이를 루돌프 대공의 개인적 여정과 관계짓는 헌정사를 쓰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 피아노 소나타는 제가 이 곡에 입문한 에밀 길렐스를 비롯하여 과거 다양한 거장 피아니스트들에 의한 좋은 연주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아래에서는 편의상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젊은 연주자 알렉산드라 도브간(Alexandra Dovgan)의 아래 실황 영상과 함께 이 곡의 내용을 악장별로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라 도브간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1악장
1악장은 서주-제시-반복-발전-재현-코다 등으로 이어지는 소나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느린 Adagio로 시작하는 서주는 아래와 같은 하행 3음으로 이루어진 고별인사(Levewohl)의 동기로 시작합니다. [0:25]
위의 고별의 동기는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현악사중주 '하프'나 1812년에 작곡된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의 2악장 등에서도 차용됩니다(후배 작곡가 말러도 마지막 9번 교향곡에서 베토벤의 이 고별의 동기를 차용합니다).
이러한 하행 3음에 의한 동기는 1악장 내내 수시로 (때로는 inversion된 형태로) 등장하여 악장의 분위기를 주도합니다.
그런데 이 고별의 동기에 이어 불멸의 연인의 강력한 후보인 요제피네에게 선물한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가 (변형된 모습으로) 연주되는데(아래 악보의 빨간색 박스 부분 및 그 아래 악보의 안단테 파보리의 요제피네 동기 참조), 이를 통해 세심한 청자는 이 작별의 인사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눈치채실 것입니다. 이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는 2악장에서도 (또 다르게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리움으로 가득한 2악장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렇게 느린 서주를 통해 핵심 동기가 제시된 이후 곡은 Allegro로 넘어가는데, [1:33] 이 Allegro에서는 (실망으로 무너져내리는 가슴을 상징이라도 하듯) 반음계로 하행하는 주제가 제시됩니다(제시부, 아래 악보의 파란색 밑줄 부분).
특이한 것은 이어지는 선율인데, [1:38] 이는 안단테 파보리를 2악장으로 하여 구상하였던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3악장의 동경과 그리움의 주제(아래 영상 참조)와 닮아 있습니다.
[발트슈타인 3악장 주제]
이렇게 제1주제가 제시된 이후 이어지는 제2주제는 독립된 성격보다는 제1주제를 기반으로 한 변주인데, 이 두 주제들은 모두 고별의 동기와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시부는 고별의 동기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악상들이 펼쳐지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더 반복된 후 [2:34] 곡은 발전부로 접어듭니다. [3:30]
발전부 역시 고별의 동기를 중심으로 짧게 전개된 후 곧 재현부가 이어집니다. [4:20]
재현부에 이어지는 코다가 이례적으로 긴 것이 특이합니다. [5:15] 여린 고별의 동기로 시작하는 코다에서는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그리움과 동경의 음형이 이전과 달리 단조로 변하면서 슬픔을 머금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 고별의 동기의 파편들이 반복적으로 각인되면서 (마치 고별의 동기에 의한 환상곡과도 같은) 1악장은 마무리됩니다.
[1악장 (포르테피아노)]
2악장
'부재'라는 표제가 붙은 2악장은 차분한 안단테의 템포에 의한 2악장은 A-B-A-B-A의 흐름을 보입니다.
우선 A 부분은 아래와 같이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의 붓점 음형을 기반으로 헤어진 요제피네에 대한 그리움을 풍부한 표정으로 더욱 절실하게 노래합니다. [7:14] 끝부분이 올라가는 이 음형은 마치 "꼭 그랬어야 했나요? 돌아올 수는 없나요?"라고 하소연하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칸타빌레에 의한 B 부분은 사랑하는 이가 떠나버린 허전한 자리를 처연한 심정으로 노래합니다(아래 악보의 파란색 부분). [8:26]
이 칸타빌레 음형의 그림자는 훗날 요제피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후 작곡된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아리에타의 도입부에까지 드리워져 있습니다.
[아리에타 도입부]
그 후 이러한 A-B 부분은 조성이 바뀌어 다시 한번 더 이어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A 부분의 붓점 음형의 물음이 집요하게 반복되다가 [10:37] 마치 그러한 물음에 대한 갑작스런 응답과도 같이 2악장의 끝은 3악장의 '재회'로 쉼 없이(attaca) 연결됩니다.
[2악장 (포르테피아노)]
3악장
'재회'라는 타이틀이 있는 마지막 3악장은 1악장처럼 서주-제시-반복-발전-재현-코다 등의 전형적인 소나타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서주 부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그에 놀라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움직임과 표정이 느껴집니다. [11:01]
짧은 서주 이후 주제가 제시되는데(제시부), 먼저 운동성이 강한 셋잇단음들을 기초로 한 제1주제가 제시되고, [11:15] 즐거운 마음이 음역을 바꾸어가며 저음에서, 또 고음에서 노래된 후 쏟아지는 웃음과도 같은 유쾌한 음형이 아래로 흘러내립니다(아래 악보의 34마디 이하 부분). [11:40] 그에 이어 마치 "우리들의 재회는 운명이 정한 것"이라고 말하듯 확신에 가득한 음형이 힘차게 연주되는데(아래 악보의 빨간색 부분), 이 부분에서는 (많은 연주들이 놓치지만) 유명한 운명의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아래 악보의 파란색 부분). [11:50]
그 후 제2주제가 이어지는데, 특히 (돌아온 이를 버선발로 달려가 맞이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듯한) 왼손 피아노의 리듬에서 요제피네의 안단테 파보리의 동기가 어른거립니다(아래 악보의 빨간색 부분 참조). [11:50]
이러한 제시부는 다시 한번 더 반복된 후, [12:50] 3악장은 발전부로 들어갑니다. [14:26]
제시부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변주가 짧게 펼쳐진 후 곡은 재현부로 넘어가는데, 재현부라고 하지만 1주제의 동기의 아티큘레이션이 살짝 달라지는 등 제시부와는 일부 변화가 감지됩니다. [15:03] 이어지는 코다는 Poco Andante의 템포로 갑자기 변화합니다. [16:28] 여기서는 베토벤의 심정을 노래하였던 1주제가 풍부한 표정으로 그윽하게 바뀌어 노래되는데 마치 "왜 이제 왔나요,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3악장 (포르테 피아노)]
임성우 변호사
[예브게니 키신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에밀 길렐스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