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관의 ‘가을축제’(1984). 애잔함을 가둬낸 예전의 ‘푸름’은 여전하지만 밝고 생동감 있는 화면에는 동화적인 세계가 떠 있다. 1980년대 작가 말기의 이 분위기에는 ‘데콜라주 기법’이 쓰였다. 콜라주를 역이용해 캔버스에 붙인 재료를 떼어낸 뒤 그 자리에 색을 칠하는 방식이다. 화업 내내 품어온 추상화한 문자도 보이고 기호화한 인간상도 보인다. 작가는 “유럽문명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갈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동양적인 사색과 낡은 공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한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200×300.5㎝.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
[정하윤 미술평론가] 1966년 프랑스 남부. 바다를 끼고 펼쳐진 지중해의 작은 도시 망통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제치고, 한 한국화가가 국제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그의 이름은 남관(1911~1990).
미술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겠느냐마는 최고상을 거머쥔 건 분명 짜릿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한국은 세계 미술계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 아닌가.
허술한 전시는 아니었다. 1951년 시작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망통국제현대회화비엔날레’. 현재까지도 격년으로 열리는 이 미술축제는 당시 유럽화단에서 꽤 영향력 있는 행사였다. 특히 1966년 전시는 피카소가 직접 포스터를 그리고, 자신의 작품까지 출품해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 자리에 한국화가가 등장해 무려 피카소를 제치고 1등상을 받은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지 11년 만에 이룬 남관의 성취는 그야말로 통쾌했다.
한국의 1세대 추상화가 남관이 프랑스로 떠난 것은 1954년 12월이었다. 마흔넷이던 그는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마르세유를 거쳐 파리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봄이 코앞이었다.
남관이 자리를 잡은 곳은 몽파르나스. 20세기 초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샤갈이 활약하던 예술가의 아지트였다. 그러나 남관이 도착한 시점엔 이미 그 찬란한 시절은 지난 뒤였다.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온 이방 예술가들의 거처가 돼 있던 터다. 남관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집세가 저렴한 몽파르나스 외곽에 자리를 틀었다.
미술학교에도 등록했다. 그림을 처음 배우는 건 아니었다. 남관은 이미 한국에서 ‘화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나 주목받았고, 열네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연구과정까지 마쳤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는 초대작가로 추천받아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관은 국내에서 ‘자리 잡은 화가’였다.
녹록지 않았던 파리에서의 삶
그런 그가 다시 파리의 미술학교 학생으로 돌아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52년 한국전쟁 중 잠깐 들른 일본 도쿄에서 본 전시회가 계기였다. 전시장에 걸린 현대적인 추상화들 앞에서 남관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거침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는 거대한 추상화면 앞에 그의 구상회화는 한없이 낡아 보였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서 공부한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서양화라고 가르친 것은 모두 기교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바로 그때 남관은 결심했다. 미술의 심장부, 파리로 가자. 한국에서 자리를 굳힌 중년의 미술가가 갑자기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관은 과감히 도전을 결심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두고 떠나 왔건만 파리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작품을 팔고 집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을 믿고 맡겼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매달 100달러를 보낸다고 약속했던 ‘아시아재단’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거다. 한국에 남았다면 대우받는 화가였을 텐데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돼버렸다. 이때의 자신을 그는 “낮에도 토굴처럼 컴컴한 방 안에서 귀신처럼 말라가던 중년”이었다고 묘사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 길은 극한의 고난이었다.
그럼에도 남관은 무너지지 않았다. 자존심을 접어두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이었고, 미술관을 무료 개방하는 날이면 빠짐없이 찾아가 대가들의 작품을 눈에 익혔다. 영양실조로 대머리가 될 만큼 고생했지만 그림은 놓지 않았다. 훗날 남관은 웃으며 말했다. “대머리는 고생스럽던 파리 생활의 선물”이라고.
당시 파리에는 남관 외에도 여러 한국작가가 있었다. 이미 미술의 중심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미국 뉴욕으로 옮겨간 뒤였지만, 우리 미술가들에게 파리는 여전히 미술의 메카였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파리 유학을 다녀온 일본 교수들을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김환기(1913∼1974)도 있었다. 김환기와 남관은 깊은 우정을 나눴고, 김환기는 먼저 귀국하면서 남관에게 “남아서 꼭 대성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남관은 그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프랑스 화단에서 그의 독특한 회화가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국제 전시에 수차례 초대받았고, 1961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1962년에는 파리시가 그의 작품을 구입해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시립미술관에 각각 소장했다. 화랑가에서도 팔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작은 화가가 서구 미술의 심장부에 ‘작가 남관’이란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서구미술 심장부에 새긴 ‘작가 남관’
남관의 작품은 개성이 강하다. 그의 특별한 화면에는 특이한 기법인 ‘데콜라주’가 큰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콜라주와는 반대되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떼어내거나 찢어내는 방식이다. ‘가을축제’(1984)는 바로 이 기법을 사용한 후기작 중 하나다. 화면 가득 밝은 색이 흩뿌려지고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형상들이 물속에서 부유하듯 떠다닌다. 구체적인 형체는 없지만 축제의 감정만큼은 확실히 전달되는 그림이다.
![]() |
남관의 ‘태고’(1967). 프랑스로 이주한 뒤 동양 정서, 고대 전설 등을 교차하며 현대적 추상에 집요하게 빠져들던 시기의 대표작이다. 가라앉은 무채색, 그 사이에 찍힌 색점이 눈처럼, 얼굴처럼 보인다. 얼핏 신라시대 왕관의 형상도 떠오른다. 엉겨붙은 저 흔적 뒤론 작가가 겪은 ‘전쟁의 기억’이 녹아 있다. 이 시절을 돌아보며 “코도 눈도 입도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은 일그러진 상, 동양의 옛 고적에 새겨진 이끼 덮인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내 머리를 꽉 채운다”고 했더랬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46×11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처음부터 축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관은 오랫동안 전쟁의 비극을 다뤘다. 일본에서 겪은 태평양전쟁과 조국에서의 한국전쟁, 두 번의 전쟁을 겪고, 게다가 해군 종군화가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던 그는 아픈 기억을 작품에 담아냈다. 전쟁 중 보았던 숱한 시체, 숱한 부상자의 얼굴은 마스크와 같은 이미지로 나타났다. ‘태고’(1967)처럼 눈·코·입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은 얼굴들은 전쟁에서 봤던 수많은 상처 입은 희생자들이었다.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프랑스 사람들은 남관의 그림에 깊이 공감했다. 이지러진 인간 형상들로부터 자신들의 상처를 봤던 것이다. 특히 남관이 선택한 추상미술의 형식은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전쟁의 기억을 반영한 어두운, 때로는 비통하고 거친 추상미술이 대세였던 시기였기에 남관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을 열었다. 단순히 서구의 형식을 따르지만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이국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화면에 떠도는 형상은 동양의 문자 같기도 하고 신라시대 왕관을 연상시키기며 자연스럽게 동양적 정서와 신비감을 부여했다. 이 융합적이고 독창적인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남관은 1968년, 미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삶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매일 10시간씩 캔버스와 씨름했고 전시를 하며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일흔을 넘어서도 여태껏 이룬 것이 뭔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며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1990년 여든아홉에 타계할 때까지 그림 그릴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던 천생 화가였다.
‘피카소를 이긴 화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미술이 어찌 경쟁이겠는가. 삶이 어찌 남과 겨루는 것이겠나. 남관이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 생의 말년 ‘축제’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피카소를 이겨서가 아니라 미술을 통해 자신 안의 상처를 회복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남김없이 불태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