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선보다 풍경이 먼저 보인다
뭘 먹을까? 해외에 도착하면 늘 먼저 입이 궁금하다. 비행기 기내식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호주 시드니에 도착한 날도 그랬다. 시드니는 바다가 도시 안으로 스며든 세계 최고의 항구 도시 아닌가. ‘그래, 오늘은 생선으로 정했다.’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이나 가락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에 가는 마음으로 시드니 수산시장(Sydney Fish Market)을 찾았다. 1964년 뉴사우스웨일즈 주 정부 기관이 운영을 시작한 이곳은 재건축을 거쳐 올해 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남반구 최대 규모 수산시장으로, 개장 두 달 만에 10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26 세계 최고의 장소’에도 이름을 올렸다.
웬트워스 공원 역에서 내려 와틀 스트리트를 따라 5∼10분 남짓 걸었다. 수산시장 동쪽 건물과 수변 광장이 눈으로 들어온다. 파도와 비늘 무늬를 형상화한 지붕, 계단식 좌석과 넓은 광장은 어디선가 본 실루엣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북쪽 매표소 입구 풍경과 묘하게 닮았다.
오른쪽으로 바다와 그 위로 연결된 대교가 들어온다. 블랙와틀 만(Blackwattle Bay)과 안작 브리지(Anzac Bridge)가 협공(挾攻)을 하며 시야를 채운다. ‘봤지?’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다. 아주 좋은 ‘애피타이저’다.
>> 거래보다 머무름이 먼저였다
입장 전까진 경매사들의 고함, 물건을 옮기는 분주한 발걸음,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를 기대했다. 한국 수산시장 분위기와 비슷하겠지? 예상은 빗나갔다. 각지에서 들어온 생선과 해산물들이 반듯하게 정렬된 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 소리가 없다. 바다를 품은 박물관 같았다. 한국의 수산시장은 참을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거래의 공간’이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 철저하게 이 말이 실천된다. 눈 구경 잠깐에 이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윈윈하는 즉석 합의를 거치면 괜찮은 맛을 즐기고 기분 좋게 끝이 난다. 시끌벅적한 ‘체험 삶의 공간’ 이다.
여긴 바다를 여유있게 경험하고, 멍 때리는 공간이다. 한국은 사고, 먹고, 이동한다. 시드니 수산시장에선 사고, 먹고, 머무르다가, 바라본다. 킹크랩과 퀸즐랜드 그루퍼, 코럴 트라우트, 블루 스위머 크랩, 태즈메이니아산 랍스터가 색을 뽐낸다. 타이거 프라운, 킹 프라운 새우는 시푸드의 끝판왕이라는데, 여기저기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고 몸 자랑을 한다.

1988년 문을 열었다는 가게에 진열된 퍼시픽 오이스터(Pacific Oyster)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먹는 굴과 비슷하다. 크기는 손바닥으로 펼쳐도 다 못 가릴 정도. 재밌게 XL 사이즈라고 메뉴판에 쓰여 있다. 칠리 폰즈 소스를 얹어주는 굴 6개(1/2 DOZ)가 20.5 호주 달러(약 2만 2000원)다. 포장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입에 넣으니 짭조름한 바다 향이 먼저 들어온다. 어디에선가 조개 육수에서 맛본 감칠맛이 비집고 들어 온다. 굴과 소스가 품는 단맛이 뒤늦게 막차 버스 타듯 밀고 온다. 씹을수록 바다 향은 더 선명해진다. ‘요것 봐라’, 딱 그 말이 나온다.
이곳에선 걸음 속도도 느려진다.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잊는 것 같다. 한국 수산시장에선 수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옷에 튈까봐 걸음을 재촉한다. 장 보는 속도도 빠르다. 그런데 시드니 수산시장은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느냐’를 많이 고민한 듯 하다. 생선과 해산물을 구경하다가 카페에 들르고, 디저트를 먹고,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생선 판매점과 스시 바, 그릴 요리 코너, 빵집, 와인 샵, 기념품 가게가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진다. 갓 구운 타르트에 샐러리와 당근, 생강을 함께 갈아 주는 시드니 쥬스를 보고 또 한 번 발길이 멈춘다. 갈등 최고조다. 고독하면서 복잡한 미식가가 되는 순간이다.
>> 시드니를 닮은 참치 한 접시
야외 테라스는 시장의 백미다. 사람들은 구입한 음식을 들고 바다 앞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머무름이 시작된다. 바다를 보고, 사람을 본다. 시간을 누리는 공간이다. 서둘러 떠나지 않아도 되는 여유, 머무를 수 있는 풍경까지 사람들이 사고 있다.
바다를 향한 시야가 막힘이 없는 레스토랑 ‘터치 우드(Touch Wood)’의 참치는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맛이다. 한 접시 24 호주달러(약 2만 5000원)의 튜나 크루도(Tuna Crudo)는 생 황다랑어를 얇게 썰어 낸 이탈리아식 생선회다. 간장 같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유자와 아보카도를 섞어 만든 크림이 생선에 적당하게 적셔 있다. 호주의 바다, 일본의 유자, 이탈리아 크루도, 유럽식 플레이팅이 한 접시 안에서 공존한다. 시드니라는 도시를 닮은 맛 같다.
>> 심장보다 먼저 몸의 온도를 만나다
시장에서 바다를 충분히 즐기고 블랙와틀 만 선착장(Blackwattle Bay Wharf)으로 걸어봤다. 수상 택시를 타고 서큘러 키(Circular Quay)로 목적지를 정했다. 여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마주 보고 있는 사이 부두. 페리와 기차, 버스가 연결되는 교통 중심지이자 각국 관광객이 시드니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그래서 일부러 반대로 움직여봤다. 바다에 들어갈 때는 심장에서 먼 곳부터 물을 적시지 않나. 서큘러 키라는 심장부터 만나기 전에 수산시장이라는 몸의 온도부터 느껴보고 싶었다.
블랙와틀 만 한 가운데서 천천히 멀어지는 수산시장을 바라보는 건 신선한 묘미다. 바다를 품은 시장에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산책하는 시민들, 물가에 정박한 작은 배들이 한 폭의 풍경처럼 펼쳐진다. 디저트까지 완벽하다. 해안가를 따라 달리는 러너들이 바다와 함께 호흡한다.

>> 바다 건너도 따라오는 시간
완전한 유연자득(悠然自得)의 상태로 서큘러 키를 본다. 눈과 몸이 유연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시선을 지긋이 길게 두게 된다. 그토록 웅장하다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릿지가 시드니의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진다. 시드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좋은 방법? 시드니는 처음이라 확실히 모르겠지만, 오페라하우스를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자. 수산시장에서 보낸 시간이 따라오고 있는지.
시드니=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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