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는 결국 '시간'에서 온다…한 잔의 술에 담긴 300년의 역사 [김성우의 사케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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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니시키 양조장 가는 길에서 보이는 후지산 전경. / ⓒ 김성우

후지니시키 양조장 가는 길에서 보이는 후지산 전경. / ⓒ 김성우

진정한 사치란 무엇일까. 어쩌면 눈에 보이는 화려한 물건을 곁에 두는 것보다 오랜 시간이 빚어낸 서사와 그 토양에 깊숙이 뿌리내린 철학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즈오카현 중심부의 도심을 벗어나 시즈오카현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웅장한 후지산 자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후지노미야시에 닿게 된다.

후지노미야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후지산이 호수에 비치는 타누키 호수나, 후지산의 모습이 다리 너머로 아름답게 보여 유명해진 꿈의 대교 등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후지니시키 양조장(富士錦酒造)'은 후지산이 둘러싼 아름다운 후지노미야시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에도 겐로쿠 시대인 1688년부터 18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양조장이다.

양조장 마당에 들어서자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낡은 기와지붕과 정성껏 가꿔진 소나무, 그리고 그 너머로 마을을 굽어보는 후지산 만년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풍경은 이곳이 단순히 술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온 공간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고즈넉한 기와지붕이 돋보이는 양조장. / ⓒ 김성우

고즈넉한 기와지붕이 돋보이는 양조장. / ⓒ 김성우

양조장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달큰하면서도 쿰쿰한 발효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텨낸 낡은 나무 서까래가 지붕을 받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쌀이 익어가는 거대한 발효 탱크들이 줄지어 숨을 쉬고 있었다.

탱크 곁으로 다가가자 진하고 달콤한 니혼슈의 향이 한층 짙게 올라와 후각을 깨웠다. 시선을 돌려 양조장 한편을 보니, 오랜 시간 장인들의 손길이 닿아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투박한 나무 압착기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곳 양조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묵묵히 오랜 시간 술을 빚어 왔는지 느껴졌다.

서늘한 양조장 내부의 모습. 낡은 나무 서까래 아래 거대한 발효 탱크들이 늘어서 있다. / ⓒ 김성우

서늘한 양조장 내부의 모습. 낡은 나무 서까래 아래 거대한 발효 탱크들이 늘어서 있다. / ⓒ 김성우

특히 발길이 오래 머문 곳은 양조장 내부의 벽면 한쪽에 정갈하게 모셔진 위패 앞이었다. 이곳의 쿠라비토(양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들은 매일 아침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이 위패 앞에 서서 간단히 절을 올린다고 한다. 그저 술이 무사히 익어가기를, 그리고 함께 땀 흘리는 이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의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다루는 일인 만큼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과 술을 대하는 이들의 오랜 예의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후지니시키 양조장 내부에 모셔져 있는 위패. 양조의 안녕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리는 곳이다. 쿠라비토들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곳에 간단한 절을 올리고 일을 시작한다. / ⓒ 김성우

후지니시키 양조장 내부에 모셔져 있는 위패. 양조의 안녕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리는 곳이다. 쿠라비토들은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곳에 간단한 절을 올리고 일을 시작한다. / ⓒ 김성우

투어를 이끌어준 18대 쿠라모토(양조장의 대표) 세이 시니치(清 信一)의 설명은 보통의 유명 양조장들이 내세우는 치열한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후지니시키 가문은 본래 지역의 지주로서 농사에 필수적인 물길을 관리하고 벼농사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 양조를 시작한 것도 바깥에 술을 내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난 뒤 고된 농사일을 묵묵히 견뎌낸 소작농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축제에 올리기 위해 정성껏 빚은 귀한 음식이 후지니시키 니혼슈의 출발점이다. 술 한 잔이 지친 몸을 달래고,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였던 셈이다.

후지니시키 양조장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설명해주는 쿠라모토. / ⓒ 김성우

후지니시키 양조장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설명해주는 쿠라모토. / ⓒ 김성우

이러한 상생의 철학은 시대가 바뀐 지금도 양조장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매년 봄이면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쿠라비라키(蔵開き, 양조장 개방 축제)'를 열어 조용한 시골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당을 내어주어 지역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도록 돕는 행사이기도 하다. 또한 겨울 농한기에는 일거리가 없는 지역 농가 사람들을 불러들여 생계를 지원한다. 이곳의 사케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인구가 줄어가는 지역 사회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벼를 재배하는 후지니시키 논의 모습. 논 너머로 후지산이 보인다. / ⓒ 김성우

벼를 재배하는 후지니시키 논의 모습. 논 너머로 후지산이 보인다. / ⓒ 김성우

후지니시키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니혼슈 특유의 맑고 단아한 맛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즈오카가 가진 지리적 혜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즈오카 니혼슈는 일본 내에서도 질감이 부드럽고 과실 향이 산뜻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 ‘후지산의 초연수(超軟水)’가 있다. 후지산의 초연수는 후지산 정상에 내린 눈과 비가 수십 년에 걸쳐 두꺼운 현무암반을 통과하며 맑게 정화된 복류수다. 후지니시키 양조장은 이를 지하에서 길어 올려 양조에 사용한다. 후지산의 초연수에는 미네랄 성분이 적어 입에 닿는 순간 물 자체가 무척 가볍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시즈오카 농업기술연구소가 오랜 시간 공들여 개발한 니혼슈 전용 쌀 '호마레후지(誉富士)'의 특징이 시즈오카에서 생산되는 니혼슈의 특색을 더 짙게 만든다. 호마레후지는 단백질 함량이 낮아 발효 과정에서 텁텁한 잡미를 내지 않아 시즈오카 니혼슈의 깔끔한 맛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맑은 물과 깨끗한 쌀, 그리고 산뜻한 향을 끌어내는 시즈오카 고유의 효모가 만나 이 지역만의 편안한 니혼슈가 완성되는 것이다.

테이스팅 테이블에서 맛본 '토쿠베츠 준마이 호마레후지(特別純米 誉富士)'는 그런 정성스러운 양조 과정이 고스란히 혀끝으로 전해지는 잔이었다. 참고로 '후지니시키(富士錦)'라는 이름은 1914년 일본 헌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가 이곳을 찾았을 때 붉게 물든 후지산과 가문의 형제들이 훌륭하게 장성한 모습을 보며 "후지에 비단이로다"라고 감탄해 지어준 것이라 한다.

잔을 들어 향을 맡아보니 잘 익은 멜론과 시원한 배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맑은 질감이었다.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니혼슈가 입 안을 가볍게 넘어가고 나면 호마레후지 쌀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과 기분 좋은 향긋함이 입안에 조용히 맴돌았다. 맛이 과하게 튀거나 자극적이지 않아 곁에 두고 오래 마셔도 질리지 않을 법한 편안함을 줬다.

양조장 사무실 한 켠에 토쿠베츠 준마이 호마레후지를 포함하여 후지니시키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니혼슈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 ⓒ 김성우

양조장 사무실 한 켠에 토쿠베츠 준마이 호마레후지를 포함하여 후지니시키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니혼슈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 ⓒ 김성우

쌀을 발효하는 발효 탱크. 향을 맡으면 진하고 달콤한 니혼슈 향이 올라온다. / ⓒ 김성우

쌀을 발효하는 발효 탱크. 향을 맡으면 진하고 달콤한 니혼슈 향이 올라온다. / ⓒ 김성우

이처럼 향긋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후지니시키 니혼슈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담백한 요리와 곁들일 때 잘 어울릴 술이다. 특히 후지니시키의 니혼슈를 마실 때 안주로는 광어나 참돔 같은 흰살생선을 얇게 저며 올리브 오일과 굵은 소금만 살짝 뿌려낸 제철 흰살생선 카르파초를 추천한다. 후지니시키 양조장 특유의 산뜻한 과실 향이 생선의 슴슴한 감칠맛을 해치지 않고 기분 좋게 돋워줄 것이다.

후지니시키의 니혼슈는 팬에 겉면만 노릇하게 구워낸 가리비 관자 버터구이와도 잘 어울린다. 특유의 가벼운 질감이 가리비의 단맛, 그리고 고소한 버터 풍미와 겉돌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것이다. 조금 더 간편한 안주를 찾는다면 리코타 치즈도 좋은 선택이 된다. 치즈 특유의 고소함과 후지니시키 니혼슈의 깔끔한 끝맛이 매끄럽게 어우러지면 별다른 조리 없이도 훌륭한 안주가 된다.

사케 한 잔을 비우는 일은 그 지역의 바람과 물, 사람, 그리고 그들이 견뎌온 세월을 함께 맛보는 일과 같다. 요란하게 겉모습을 꾸민 술보다 투박한 잔에 담긴 오랜 이야기를 찬찬히 짚어내는 즐거움. 시즈오카의 낡은 기와지붕 아래서 조용히 익어가는 후지니시키 양조장의 풍경은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담백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주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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