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만 믿고 아파트 입주했는데…"3억 날렸다" 피눈물 [전세 사기 그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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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전세 보증금 4억원에 계약을 맺은 빌라. 사진=이송렬 기자

정씨가 전세 보증금 4억원에 계약을 맺은 빌라. 사진=이송렬 기자
전세 사기는 단순히 집주인이 돈이 없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못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보증금을 떼먹을 생각으로, 아예 능력이 없는 집주인이 여러 세입자를 끌어들여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2022년 대규모 전세 사기 피해 사례가 시장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후에도 그 피해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제쯤 세입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전세 사기 현황과 전망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편집자주]

#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한 빌라(다세대·연립)에 세 들어 사는 40대 정모씨. 2021년 전세 사기에 휘말린 이후 벌써 4년이나 지났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개인 파산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라 그의 한숨은 깊어져 간다.

정씨의 악몽은 2021년 6월 시작됐다. 신혼집을 구하던 정씨는 현재 사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고 당시 집주인 B씨와 계약을 맺고 잔금을 치르기로 했다. 잔금을 치르기로 한 날 집주인 B씨는 "집을 팔았다"며 새로운 집주인 A씨를 데리고 왔다. B씨는 "A씨가 아직 잔금을 치르지 않았다"며 보증금을 달라고 했다.

정씨는 불안하긴 했지만 분양 실장이라는 C씨와 부동산 공인중개사 D씨가 함께 있었던 만큼 믿고 보증금을 줬다. 5명이 모인 가운데 이뤄진 거래였고 당사자가 모두 참석해 정씨는 의심을 덜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일대의 빌라들./  사진=이송렬 기자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일대의 빌라들./ 사진=이송렬 기자

곳곳에서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정씨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금 반환보증보험을 신청했다. 하지만 HUG에선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고 답했다. 새 집주인 A씨가 국세를 내지 않아 인천세무서에서 집을 압류했다는 이유에서다.

시간이 흘러 그 사이 정씨는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됐다. 돈은 돌려받지 못했지만, 피해자로 인정받아 전세보증금 대출을 한 번 연장할 수 있었다. 거주하는 집은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를 통해 공매가 진행됐다. 정씨는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전세 대출 만기가 다시 도래했고 일단 은행을 통해 전세 대출을 연장했지만 낙찰자가 여전히 취등록세를 내지 않은 상황이라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다. 6개월 뒤엔 또다시 전세 대출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장 낙찰자에게 취등록세를 내라고 읍소할 수 밖엔 없다. 만약 일이 꼬인다면 최악의 경우 개인 파산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정씨는 "내가 어쩌다 이런 집을 찾게 됐는지 나조차도 답답하다"며 "기회가 된다면 얼른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청년안심주택, 근심주택됐다

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서울시가 청년 주거 안정을 위해 도입한 '청년안심주택'에서도 전세 사기가 발생했다. 청년안심주택은 서울시가 19~39세 대학생과 청년, 신혼부부 무주택자에게 시세보다 낮게 공급하는 임대주택이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공사)가 운영하는 공공임대와 민간임대사업자가 운영하는 공공지원 민간임대 등이 있다.

문제는 일부 단지의 경우 HUG 등 임대보증보험에 가입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송파구 잠실센트럴파크의 경우 시행사가 공사비를 지급하지 못해 법원이 경매 개시를 결정했고 입주자들은 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 단지의 보증금 피해액은 약 238억원, 가구당 최대 3억원이 넘는다.

이 밖에도 청년안심주택 73곳 가운데 보증보험 미가입 사업장 4곳은 공사 대금 등 채무를 갚지 않아 경매에 넘어가거나 가압류돼 287가구가 보증금을 떼일 위기다. 일부 사업장은 보증 보험 연장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큰돈을 가지고 이제 막 사회에 첫걸음 내디딘 청년들이 서울시만 믿고 입주한 아파트에서 사건이 발생해 한순간에 단 한 푼도 못 받게 생긴 셈이다.

잠실센트럴파크에 거주하는 A씨는 "사업자를 잘 따지고 선정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서울시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했고, 또 다른 입주자 B씨는 "서울시가 하는 공공주택이라고 입주했는데 이런 상황에 부닥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도 했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후속 조치에 나섰다. 보증금 선지원 제도 시행과 함께 저금리 금융지원 확대로 사업자 부담을 줄여 청년주택 공급 활성화를 유도하고 보증금 미반환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의 제도 개선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또 청년안심주택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재구조화를 추진한다.

다만 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 수석 위원은 "전세사기를 막기 위해 위험 분석 리포트를 내놓고 임대인 지원 협의체를 마련하는 것은 시장 신뢰도를 높이는 내용"이라면서도 "다만 실제 세입자들이 리포트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이고 임대인 지원 협의체도 세입자 보호보다는 사업자 지원에 치우친다는 인식이 생기면 정책 신뢰성이 약해질 수 있다"고 했다.

집 구하다 사기당한 실수요자만 3만명 넘어서

국토교통부는 지난 6월 국회 교통위원회에 전세 사기 유형, 피해 규모 등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간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에 접수된 피해사실 조사, 법원·관계기관 협조 등으로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전세 사기 피해자로 결정된 이들은 3만400명이다.

이 가운데 MZ세대가 전체의 90%에 달했다. 30대의 비중(49.28%)이 가장 높았고 20대(25.83%), 40대(13.95%) 순이었다. 상위 3개 구간의 합이 전체 피해자의 89.07%를 차지했다. 보증금 규모는 대다수가 3억원 이하(97.46%)였고, 1~2억원이 42.31%로 가장 비중이 높았다. 1억원 이하가 41.88%로 뒤를 이었다.

해자의 절반 이상은 수도권(60.3%)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 대전(11.7%)·부산(10.9%) 거주 피해자 비중이 높다. 상위 5개 지역의 피해자 비중이 전체 피해자의 83.0%를 차지했다.

정부는 2023년 '전세사기피해자법'을 만들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피해자로 인정되고, 이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주는 게 핵심이다. 피해자가 사는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집을 사들일 수 있는 권리를 준다거나 집을 매수할 때나 다른 집으로 이사할 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식이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정씨는 "공매로 집이 낙찰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캠코는 공매가 끝났다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고 금융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더니 국세청으로, 국세청에 찾아가 다시 물었더니 제대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었다"며 "법무사도, 변호사도 이런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출 만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전세사기피해자법이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법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국회는 사실상 전세사기와 관련해 손을 놓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다수의 의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2023년 전세 사기 특별법을 내놓은 이후 사실상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국민의힘도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다"면서 "전세 사기 피해자는 늘어가는 데 정부와 국회 등에선 이렇다 할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중편에서 계속.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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