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힘들겠죠…그런데 집주인도 죽겠어요" [전세사기 그후 中]

3 weeks ago 12

서울의 한 빌라 밀집 지역.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서울의 한 빌라 밀집 지역.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전세 사기는 단순히 집주인이 돈이 없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못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보증금을 떼먹을 생각으로, 아예 능력이 없는 집주인이 여러 세입자를 끌어들여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2022년 대규모 전세 사기 피해 사례가 시장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후에도 그 피해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제쯤 세입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전세 사기 현황과 전망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편집자주]

전국에서 전세 사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한 이후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은 아무래도 세입자일 것이다. 내 집도 아닌 데다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입자들이 고통받는 사이 집주인들도 함께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작정하고 돈을 떼먹으려는 일부 집주인들 때문에 선량한 집주인들까지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 대출받고, 대출까지도 모자라 주변 지인에게 돈을 빌려 세입자에게 돈을 내주는 상황까지 몰렸다. 하지만 집주인을 '원흉'으로 보는 정책 탓에 돈줄이 막혔고 이제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막다른 길로 몰린 상황이다.

8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2022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세 사기가 퍼지면서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2023년 5월 이른바 '126% 룰'을 도입했다. 국토교통부는 전세 사기에 반환보증이 이용되는 것을 막으려 가입 요건을 강화했는데, 보증 한도를 공시가격의 140%까지만 인정해주고 담보인정비율을 90%로 낮췄다. 이에 공시가격의 126%(140%*90%)까지만 반환보증을 받을 수 있는 '126% 룰'이 나오게 됐다.

'126% 룰'을 쉽게 설명하면 전세 보증금을 빌라(연립·다세대)의 공시가격의 126%까지만 받을 수 있단 얘기다. 만약 공시가격의 126%를 넘어가면 임대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빌라의 경우 아파트보다 전세 사기의 위험이 더 큰데 보증보험에 가입이 되지 않는 집은 세입자들이 꺼릴 수 밖엔 없다. 때문에 집주인은 보증보험을 가입할 수 있도록 전세 보증금을 공시가의 126% 수준까지 낮춰야 한다.

"당장 10억을 어디서 구하나"…화곡동 집주인 '곡소리' [전세사기 그후 中]

빌라 등 비아파트의 경우 아파트와 달리 공시가격과 시세의 괴리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수도권 기준 시세 1억원 정도의 원룸을 가정하면 이들의 공시가격은 통상 3000만~4000만원 수준이다. 공시가의 126%로 환산하면 5000만~6000만원이다. 시세보다 4000만~5000만원 낮다. 집주인이 보증보험에 들기 위해선 당장 전셋값을 4000만~5000만원 내려야 한다.

단순히 빌라 2가구만 가지고 있어도 당장 1억을 내줘야 하는데, 만약 10가구, 20가구를 가진 주택임대사업자의 입장에서는 5억~10억원을 마련해야 하는 셈이다. 집주인들 입장에서 곡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서울보증보험(SGI)이 해당했는데 최근에 한국주택금융공사(HF)까지 반환보증 기준을 강화하기로 했다. 은행 재원 일반 전세 자금 보증과 무주택 청년 특례 전세 자금 보증 신청자를 대상으로 임차 보증금과 선순위 채권(기존 대출)을 합한 금액이 집값의 90%를 넘을 경우 앞으로 보증을 거절하겠다는 방침이다. 법인 임대인은 이 비율은 80%로 더 제한하기로 했다. 집주인들은 HUG와 SGI에서 막혔던 보증은 HF를 통해 받아왔는데 우회로까지 차단한 셈이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서 시장에선 집주인들이 크게 반발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빌라를 소유하고 있는 한 집주인은 "이미 문재인 정부 때부터 대출이 막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선 완화한다는 얘기만 있었지 결국 하지 않았다"며 "이번 이재명 정부 들어선 다시 규제에 나서면서 집주인들은 파산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관악구에서 임대사업자를 내 빌라를 운영하는 또 다른 집주인은 "전세 사기에 가담한 정말 질이 안 좋은 집주인을 솎아내려고 얼마나 많은 선한 임대인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며 "이미 돈도 주변에서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렸고,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수도권의 한 모델하우스에서 방문객들이 주택 모형을 살피고 있다.  /사진=한경DB

수도권의 한 모델하우스에서 방문객들이 주택 모형을 살피고 있다. /사진=한경DB

정부가 내놓은 9·7 대책에서 임대사업자에 대한 대출 규제 문턱을 더 높이면서 새로운 피해 사례도 생겼다. 대책에 따르면 임대사업자의 경우 수도권과 규제지역에서 LTV 0% 적용된다. 사실상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완전히 차단됐다. 신규뿐 아니라 기존 등록 사업자도 대출이 안 된다.

문제는 임대사업자의 지위로 분양받았을 때다. 현재 중도금 대출엔 규제가 적용되지 않지만 잔금 대출의 경우 수도권에선 주담대가 6억원으로 제한된다. 임대사업자는 중도금 대출에서 잔금 대출로 갈아탈 때 은행을 통해 단 한 푼도 조달받지 못한다.

오피스텔이나 빌라를 보유하고 있는 임대사업자들은 비아파트이기 때문에 임대사업자 자진 말소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사업자 지위를 갖춘 매수인에게 매물을 넘겨야 하는데 시장이 낙관적이진 않아 이마저도 사실상 어렵다. 퇴로가 막힌 것이다.

성창엽 대한주택임대인협회 회장은 "정부가 규제일로의 정책을 내놓으면서 앞으로 무수한 피해 사례들이 쏟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시장 혼란은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보증금 보증가입요건이 개선과 또 보증금 반환 대출 규제 완화, 주택 수 기준의 중과세 구조 개선 등 임대인들의 상황을 반영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다만 일각에선 집주인들이 겪는 어려운 상황조차 시장이 정상화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현재로선 집주인들의 퇴로를 열어줄 마땅한 방법은 없다고 본다"며 "퇴로를 열어주면 그간 부동산 안정을 위해 내놨던 정책들이 무너져 시장 안정화와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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