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와 함께 휘날리는 화려한 드레스, 손뼉 소리와 캐스터네츠가 만들어내는 경쾌한 리듬, 뜨거운 선율 위에서 펼쳐지는 격정적인 춤사위. 스페인 음악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 모든 요소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기타가 있었다. 기타는 스페인의 민속 음악과 춤의 흐름을 주도하며, 무대 위에서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상징적인 악기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는 바이올린을 통해, 기타와는 또 다른 색채로 스페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에서 태어난 사라사테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으로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과 나바라 지역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한 뒤, 뛰어난 기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약했고,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 에두아르 랄로(Édouard Lalo, 1823~1892) 등 당대 저명한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헌정 받을 만큼 음악계의 중심에 있었다.
사라사테의 이름은 영국의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의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시리즈 중 〈빨간 머리 연맹(The Red-Headed League, 1891)〉에서도 언급된다. 당시 널리 읽히던 소설 속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라사테가 얼마나 잘 알려진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라사테가 오늘 오후 세인트 제임스 홀에서 연주하지요. 어때요, 왓슨? 이런 무료한 생활을 일주일이나 더 견딜 수 있을까요?" ("Sarasate plays at the St. James’s Hall this afternoon," remarked Holmes. "What do you think, Watson? Could your patience endure a week of this?")—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 빨간 머리 연맹』 중
한편 사라사테는 연주자로서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작곡가로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 스페인의 정서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으며, 이를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담아 개성 있게 표현해냈다.
사라사테가 고향의 정서를 가장 직접적으로 녹여낸 작품은 단연 〈스페인 무곡(Spanish Dance)〉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 작품은 1877년부터 1882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Op. 21, 22, 23, 26에 각각 두 곡씩 수록되어 총 여덟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 수록된 ‘말라게냐(Malagueña)’, ‘로만자 안달루자(Romanza Andaluza)’, ‘자파테아도(Zapateado)’, ‘호타 나바라(Jota Navarra)’ 등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아라곤 지방 무곡 양식을 차용해 만든 곡들이다.
이와 함께 포함된 ‘하바네라(Habanera)’는 원래 쿠바 기원의 2박 계열 무곡 양식으로, 19세기 스페인에서 크게 유행했다. 사라사테는 이 이국적인 무곡의 리듬을 바이올린 선율로 풀어내어 당대 청중의 취향을 섬세하게 반영했다. Op. 21 No. 2와 Op. 26 No. 2로 작곡된 두 곡의 ‘하바네라’는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녔지만, 모두 무대에서 꾸준히 연주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연주자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은 ‘자파테아도(Zapateado, Op. 23 No. 2)’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곡 양식을 바탕으로 작곡된 이 곡의 제목은, 스페인어로 ‘(구두로) 발장단 맞추기’를 뜻하기도 한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이 특유의 발동작을 역동적으로 묘사하며, 현을 손끝으로 뜯어 표현하는 피치카토(pizzicato) 주법은 춤곡의 생동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춤과 함께 연주되는 사라사테의 ‘자파테아도(Zapateado, Op. 23 No. 2)’ – Ballet Nacional de España]
사라사테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르멘 판타지(Carmen Fantasy, Op. 25)〉는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속 멜로디를 차용해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이다. 스페인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 <카르멘>은 작곡가가 상상한 ‘이국적 스페인’의 모습을 갖고 있는데, 사라사테는 그 안의 인상적인 선율들을 모아 환상곡으로 재해석했다.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서주(Introduction)를 포함해 총 다섯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악장은 아래 표와 같은 비제의 원곡 선율을 기반으로 한다.
이 작품에서 스페인 음악의 색채가 특히 두드러지는 악장은 서주와 네 번째 악장이다. 서주(Introduction)에 반영된 ‘아라고네즈(Aragonaise)’는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전통 무곡 양식에서 유래한 곡으로, 힘 있고 추진력 있는 리듬을 갖고 있다. 원곡에서는 4막의 전주곡으로 등장하고, 투우 경기를 앞둔 세비야 거리의 고조된 분위기를 묘사한다. 사라사테는 이 선율을 작품의 서두에 배치하여 청중의 깊이 있는 몰입을 이끌어낸다.
네 번째 악장(Allegretto Moderato)의 기반이 된 ‘세기디야(Seguidilla)’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3박 계열 무곡 양식을 바탕으로 작곡된 곡이며, 빠른 템포와 간결한 리듬 속에 유혹의 감정을 담고 있다. 오페라 속에서는 카르멘이 끌려가는 상황에서 호세를 꾀어내는 장면에 등장한다. 섬세하면서도 날렵한 바이올린의 기교로 재해석한 이 부분은, 사라사테의 세련된 감각을 잘 보여준다.
[카르멘 판타지(Carmen Fantasy Op.25) – Julia Fischer]
이처럼 사라사테는 고향 스페인의 민속적 감각과 정취를 바이올린을 통해 펼쳐 보였다. 전통의 뿌리를 딛고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 그의 음악들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의 무대에서 울려 퍼지며 청중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이준화 바이올리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