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년사진 No.115 (2025년 5월 31일)
● 평양 시민운동회와 무명의 마라토너개인적으로 마라톤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직 한 번도 직접 뛰어보진 못했고, 그 대신 수십 차례의 마라톤 대회를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2만 명의 선수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촬영하기도 하고, 주요 선수들을 가까이서 기록하기 위해 뒷걸음치며 함께 달려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매번 렌즈 너머로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마라톤 사진을 소개하려 합니다. 1925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부록 1면에 한 마라토너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조선 곳곳에서는 마라톤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 열기는 언론과 학교, 운동회, 청년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혼자 서 있는 사진 속 인물은 그 많은 대회 중 하나였던 1925년 5월 24일 평양시민운동회에서 우승한 박량성 선수라고 합니다. 박량성 선수의 직업은 신문 배달부였습니다. 이날 운동회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됐고, 32개 단체에서 247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관람객 수는 무려 8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승 단체에는 우승기와 메달이 수여됐고, 마라톤 우승자에게는 순금 회중시계가 주어졌습니다.국가기록원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에 따르면,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마라톤 경기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한 ‘경성 일주 마라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오른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었습니다.그렇다면 손기정 선수는 언제 처음 신문에 등장했을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 손기정의 첫 등장과 성장
1932년 3월 21일, 경성과 영등포를 잇는 장거리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고려육상경기회 주최로 열린 제2회 ‘경영(京永) 마라톤’ 대회에서, 훗날 조선 스포츠사의 한 획을 긋게 될 이름 손기정이 신문 지면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며, “상쾌한 봄기운 속에 열린 제2회 경영 마라톤 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총 31명의 선수가 광화문 동아일보 앞 광장을 출발해 영등포를 돌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15마일(약 24km)을 달렸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프 마라톤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출발은 낮 12시였습니다.
이 보도에서 손기정은 ‘신의주 출신 청년 손기정’으로 소개됩니다. 결승점인 경성운동장에서 비교적 빠른 기록으로 들어온 그는 “경쾌한 발놀림이 인상적이며 장래가 유망한 주자”로 언급됐습니다.비록 그날 우승자는 경성 출신의 변룡환이었고, 1시간 21분 54초의 기록으로 “연습의 결실이 빛난 날”이라 극찬을 받았지만, 손기정에 대한 주목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대회를 종합적으로 조망한 기사에서는 “지방 출신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그중에서도 신의주 대표 손기정의 주법은 안정적이어서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따랐습니다.
이후 손기정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여러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1933년부터는 경평 마라톤, 신춘 마라톤 등 다양한 대회에 꾸준히 출전하며 기록을 단축했고, 1935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니쇼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라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 1936년 6월 20일, 장도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을 거쳐 독일로 향하는 조선 출신 선수들의 모습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이 기사에서 신문은 ‘장도(長途)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며, 그들의 결연한 의지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강조했습니다.
“조선인의 자긍심을 품고 국제무대로 향하는 이들이 곧 세계와 맞서 싸우며, 조선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단순한 출국 보도를 넘어 당시 조선 청년들 몸에 실린 시대의 무게와 국민의 염원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 마라톤은 시대의 주자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마라톤의 시작은 대개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 곳곳에서 ‘달리기’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하던 시민들에게는 축제였고, 어른들이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년들에게는 영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싼 장비나 시설이 필요 없었기에, 아이들은 골목에서 저마다의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중 한 소년이, 훗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소년에 대해 사회 전체가 관심과 응원 그리고 재정 지원을 했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1933년 11월 3일자 신문을 보면, 중국 안동현의 사업가들 30명이 “19세 중학생으로 비록 비공인이지만 세계 기록을 깨뜨린 손기정의 소식을 듣고 소속 양정고 교장에게 27원30전을 송금하며, 스파이크 한 켤레라도 사는 데 보태 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출발한 손기정 선수는 포함되지 않지만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본진 선수 들과 임원들을 위해 올림픽 특별열차를 편성해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를 통과해 대륙으로 편하게 갈 수 있게 했다는 보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무명의 마라토너 사진을 통해, 한국 마라톤의 출발선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뿌리 없는 꽃은 없다’는 말처럼, 손기정 옹의 올림픽 우승이라는 영광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기적이 아니라 시대의 열망과 천재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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