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 이야기]왕실 서고 규장각, 정조 땐 ‘인재 양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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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이달 창설 250주년 맞아 정약용-박제가 등 키워낸 학술기관 벼슬길 막힌 서얼 출신 학자들 등용 오늘날 ‘블라인드 채용’과 닮아있어 조선 후기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奎章閣圖). 정조는 우수한 젊은 문신을 선발해 규장각을 중추적인 학술기관으로 성장시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779년 가을 어느 밤, 창덕궁 후원의 한 건물에서 네 사람이 등불 아래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청에서 들여온 책을 검토하고 옮겨 적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이들은 아버지가 양반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있던 서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나라의 학문과 정책을 이끌 기관이 불러들였습니다.● 학문의 별, 개혁을 이끄는 배움터가 되다 규장각의 ‘규(奎)’는 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학문을 맡은 규성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학문의 별이라는 뜻으로, 왕의 글과 학문을 상징합니다. 이 명칭은 숙종 때 왕실의 글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에서 처음 쓰였습니다. 1776년 3월 즉위한 정조는 곧바로 창덕궁 후원에 2층 규모의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 건물이 완공되자 아래층에는 숙종이 쓴 옛 규장각 현판을 옮겨 걸고, 위층에는 주합루라는 글자를 직접 써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단순히 왕실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통해 학문을 진흥하고 인재를 길러냈듯, 학문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를 직접 길러내는 개혁의 장소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올해 9월은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지 250년이 되는 뜻깊은 달입니다. 정조는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인재를 고루 뽑아 쓰는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노론, 소론, 남인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는 한편으로 학문 진흥을 통해 국정 개혁의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규장각에 조선과 중국의 책을 두루 모으고, 이를 토대로 여러 서적을 펴냈습니다. 또 초계문신제를 마련해 37세 이하의 젊은 관리 가운데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40세가 될 때까지 규장각에서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습니다. 즉, 국가가 직접 인재를 키우는 제도였습니다. 정조 재위 기간에 약 140명이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정조는 직접 문제를 내고 채점하며 이들의 실력을 살폈습니다. 훗날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역시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을 넘어 검서관이 되다 당시 조선에는 능력이 있어도 신분의 벽에 막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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