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인문학으로 세상 읽기]삶의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있나요

3 hours ago 3

수용소에 갇힌 지식인들 책 못 읽자 외워서 암송
작가의 노쇠한 할머니 셰익스피어 작품 외우며
삶의 마지막 여행 준비

희곡 ‘바이 하트(By Heart)’에서는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할머니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집 ‘소네트’를 추천받아 하루 한 편씩 외우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시집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시를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암송했다. 게티이미지뱅크

희곡 ‘바이 하트(By Heart)’에서는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할머니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집 ‘소네트’를 추천받아 하루 한 편씩 외우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시집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시를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암송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통 흥분했던 시간도 훌쩍 지나, 지난해는 이름도 낯선 ‘라슬로 크러스너호르커이’라는 헝가리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국내의 굵직한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을 찾을 수 없었고, ‘알마출판사’라는 곳에서 유일하게 그 작가의 한국어 번역본을 꾸준히 출판해 왔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 출판사에서는 훌륭한 희곡 시리즈를 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바이 하트(By Heart)’는 ‘기억하기’에 대한 굵직한 성찰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 여름, 얇고도 강력한 힘이 있는 희곡 한 편 어떠실까요.

● “내면에 지닌 것은 건드리지 못한다”이 책에는 억울한 옥살이나 수용소에서 견딘 사람들이 책을 읽었던 방법을 소개합니다. 암기한 내용을 구두로 전파하고 들으면서 기억을 통해 책을 공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갇힌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책을 지닐 수 없게 되자 읽은 책들을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는 시나 산문에 바칠 수 있는 가장 값진 헌사는 그것을 외우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라면서요. 이렇게 ‘기억하기의 힘’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저자는 갑자기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아흔셋의 할머니는 남은 시간 동안 외울 만한 책을 한 권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저자는 고심 끝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선물하고, 할머니는 하루에 소네트를 한 편씩 외워 갑니다. 이로써 이야기는 가지를 뻗어 두 가지 축으로 흘러가게 되지요. 이야기는 물을 담뿍 머금은 식물처럼 점차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희곡은 갑자기 관객 10명을 무대에 초대합니다. 그들은 ‘소네트 30’을 한 줄씩 암송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한 줄 한 줄 소네트를 암송하는 관객을 따라 독자들도 함께 그 구절들을 읊조리게 됩니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 할머니의 소네트, 그리고 관객들이 한 줄씩 외워 가는 소네트…. 이 세 가지 매듭은 점차 하나로 단단히 묶여 갑니다. 결국 관객 10명이 제시된 ‘소네트 30’의 14행을 다 외워 갈 즈음에, 이 시가 한 편의 노래로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를 관통하는 삶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독자들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 기억과 정성, 마음을 다해 기억하고 싶은 무엇독자는 말미에서 시력을 잃어가며 시를 외우던 할머니를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기억만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책의 한 구절인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은 건드리지 못한다”라는 문장을 곱씹게 되지요.

그렇다면 이건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한 희곡인 만큼 집단적 연대와 확장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옮긴 이의 말을 빌리면, ‘소네트를 외우는 행위는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극장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과정은 다른 관객들과 공유되는 집단적 경험으로 확장된다’고 하니까요.

‘By Heart,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삶의 끝자락에서 소네트를 읊조리던 할머니의 주름진 입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암흑 속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외우던 지식인의 외침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무엇을 외치고, 무엇을 담아내면 좋을까요.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청력을 잃어가는 음악가 등 위인들의 삶만 무구한 감동을 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소네트를 외워서 간직하는 인간의 귀한 마음을 생각하며, 내가 무대에 오른 관객인 양 소네트를 암송해 봅니다. 내 마음에 담을 문장을 선별하고 가다듬어 봐야겠습니다.

● 희곡에 나온 ‘소네트 30’“감미롭고 고요한 명상에 잠기어 / 지나간 옛 기억을 불러올 때면, / 내가 찾던 많은 것들을 이루지 못함에 한숨짓고, / 옛 슬픔이 밀려와 귀한 시간 허비했음을 새삼 한탄하네. / 죽음의 끝없는 밤 속에 묻힌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 메말랐던 눈이 눈물에 잠기고, / 오래전 끝난 사랑의 고통에 다시 눈물짓고 / 사라져간 여러 모습들의 상실을 애도하네. / 그러면 지나간 아픔을 다시 아파하며, / 무거운 심정으로 비통한 사연을 일일이 헤아려 / 그 슬픈 사연들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 진작에 그 값을 치렀는데도 다시 치르네.”

조현정 세종과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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