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아카데미 시상식 등의 생중계 동시통역사이자, 시사·영화·미술·골프 등 분야를 넘나드는 방송인. 그리고 기자 출신. 안현모가 거쳐온 직업이다. 다양한 곳에서 불리며 활약하는 배경엔 그의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적 기질이 있다. 인터뷰나 각종 행사의 진행·통역을 맡으면 며칠을 소진해 출연자의 모든 저서는 물론 그가 쓴 수년 치 블로그 글까지 찾아 읽는다. 주최 측이 이런 노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는 여행 갈 때조차 최선을 다해, 한 국가에 대한 책을 무려 스무 권 읽고 떠나는 사람이다. 기자와 만났을 땐 그렇게 읽은 책 중 한 권을 꼽아 ‘쓰는 데 300년은 걸렸을 것 같은 위대한 책’이라며 각종 감탄사와 함께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기자는 인터뷰 뒤 책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현모를 서울 신사동 메종 사우스케이프에서 만났다.
▶집 책장엔 어떤 책이 꽂혀 있나요?
"일을 워낙 다양하게 하다 보니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이 여러 분야 책들이 있어요. 집이 좁아서 책장만 겨우 넣고 책을 겹겹이 쌓아놨어요. 제 삶의 피로함이 느껴지는 것 같네요. 제 책장의 특징은 지인이 쓴 책이 많다는 거예요. 저자 사인을 받은 책으로 책장 한 면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죠. 기자 했다가 방송을 하다 보니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인, 학자 등 각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요. 지인들이 낸 책을 챙겨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예요. 저는 아는 사람이 쓴 책은 다 사서 보거든요."
▶책을 선물 받아도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다 챙겨 읽는군요.
"제가 내향형 인간이라 누군가에게 관심, 호감이 있어도 생각보다 먼저 표현을 잘 못 해요. '밥 먹자'고 문자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스타일인데, 저한테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방법의 하나가 그가 쓴 책을 읽는 거예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보면서 상대를 알기 위해 몇 시간을 쏟는 것. 그게 저의 애정 표현이에요. 한 사람과 커피를 몇 번 마시는 것보다 그 사람이 쓴 책을 만났을 때 상대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자가 십수 년 전에 써서 절판된 책은 중고서점에서 찾아 사 보기도 해요. 상대방이 놀랄 때도 있어요.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제 책장엔 제가 거쳐온 소셜 네트워킹의 궤적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엔 어떤 책을 즐겨보나요?
"에세이나 경영서를 즐겨 읽는 편입니다. 성장에 대한 욕구가 큰 편이라 늘 자기 계발에 욕심이 있어요. <엑설런스>,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 같은 책이 떠오르네요. 다 비슷한 말 같은데도, 심지어 책을 쓴 저자조차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 자신에게 계속 세뇌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정말 편할 때, 감상에 젖기 위해 책을 읽는 행위는 저한테 궁극의 럭셔리에요. 그걸 즐길 수 있게 된 지도 몇 년 안 됐어요. 워낙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책은 일 진행을 위해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코로나 시기에 일이 줄면서 목적 없이 책을 꽤 읽게 됐어요. 해외여행 가서 5성급 호텔에서 자는 것보다 호사스러운 경험이었죠. 최근 혼자 살게 되면서 방해받지 않고 내 멋대로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어요. 요즘 누리는 자유로움의 큰 부분이죠. 지금은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읽고 있어요."
▶코로나 시기 목적 없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됐을 땐 어떤 책을 읽었나요?
"그때 마침 오프라 윈프리가 쓴 <언제나 길은 있다>(The Path Made Clear)를 번역하게 됐어요. 윈프리를 비롯해 디팩 초프라, 마이클 싱어, 엘리자베스 길버트 등 90여 명의 명사가 남긴 말을 엮은 책인데요. 이 책에 그들이 쓴 저서도 언급돼 있어요. 그 주석을 따라 책 읽기를 시작했어요.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법이죠. 이 책에 엘런 쇼를 진행했던 엘런 디제너러스도 나오는데, 그의 농담집 <Seriously...I'm Kidding>, <My Point...And I Do Have One>을 사서 보는 식이었죠. 그렇게 수십 권을 봤어요. 평소 우울해지는 것보다 재밌는 걸 추구하는 편입니다. 책도 슬프거나 너무 감상에 젖는 건 잘 안 읽는 편이에요."
▶최근 인상적으로 읽은 책은 뭐가 있습니까.
"제가 정말 '샤라웃(Shout out)' 하고 싶은 책이 있어요. 지난 설 연휴에 예정돼 있던 출장이 취소되는 바람에 일정이 붕 뜬 상태에서 혼자 포르투갈에 가게 됐어요. 돈도 못 벌고, 포르투갈은 이미 가봤던 곳이라 꿀꿀한 거예요.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하고 용산도서관에서 포르투갈 관련된 책을 싹 다 빌렸어요. 설 연휴 특별 이벤트로 한 달 동안 스무 권 넘게 대출이 됐거든요. 사진만 그럴듯할 뿐 깊이가 없는 책부터 연구 서적, 맛집과 숙소 정보가 담겨 있는 여행서 등 온갖 책이 다 있었는데, 그중 한 권의 책이 너무 위대해서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포르투갈은 블루다>라는 책입니다. 꽤 두꺼운데 이 책을 여행지에서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계속 넘겨봤어요. 나중엔 책이 닳아서 반납할 때 도서관에 약간 미안할 정도였죠.
▶도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해지네요 .
"이 책은 얼핏 봐선 여행책 같지만, 인문학 서적입니다. 책을 쓴 조용준 작가는 신문기자 출신이에요. 주간지 편집장까지 지내고, 마흔다섯 살 전에 '내 책'을 쓰겠다며 은퇴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걸 실천 중이죠. 그런데 세상에, 이분은 도자기 전문가예요! 도자기에 관한 책을 7권이나 썼어요. <유럽 도자기 여행>, <일본 도자기 여행>을 지역별 시리즈로 냈죠. 또 이분은 프로방스(프랑스 남부) 전문가예요. 10년 넘게 매해 프로방스를 찾았고, <프로방스에서 죽다> 시리즈를 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아닙니다. (웃음) <포르투갈은 블루다>를 읽고 너무 흥미로워서 저자에 대해 찾아봤어요. 작가가 도자기에 대해 이토록 방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도자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등 역사를 알아야 했을 거잖아요. 도자기는 항로가 개척되면서 이동했으니까요. 더구나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연 나라죠. 그래서 저자는 세계사와 포르투갈 역사에 밝은 사람인 거예요. 이 책은 감동 그 자체예요. 마지막엔 철학까지 담기며 끝이 나는데 출판사에 전화할 뻔했어요. '이렇게 좋은 책을 세상에 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제 평생에 걸쳐서라도 이 작가가 쓴 책은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취재력이요. 그냥 '나 한 번 갔다 왔어'가 아닌 엄청난 취재가 돋보이는 방대한 리서치. 포르투갈에 '왕비의 도시'로 불리는 오비두스란 곳이 있어요. 이름처럼 무척 예쁘고 로맨틱한 도시에요. 보통은 아기자기한 상점을 걷고 유명하다는 체리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오기 마련이죠. 이 작가는 그 조그만 마을의 소박한 박물관에 들러 조각과 도자기에 관해 취재해 썼어요. 누가 만들어 선물했고, 어디에서 발견됐는지, 장식은 누구에게 의뢰받아 얼마나 걸려 만들었는지…. 이 책의 어떤 페이지엔 '아무리 찾아봐도 이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는 문장도 있어요. '확인했는데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라는 것도 취재의 결과물이잖아요. 어떻게 300년은 걸렸을 것 같은 이런 책을 썼을까, 정말 대단하죠?"
▶오비두스도 직접 가봤나요?
"갔죠. 이 책을 따라 보통 여행자라면 안 들를 법한 구멍가게 같은 작은 성당도 찾아다녔어요. 현지인, 택시 기사도 모르는 곳이었죠. 이 책이 아니었으면 저는 포르투갈에 대해 제가 느낌 감동의 10분의 1도 못 느꼈을 거예요."
▶포르투갈 여행을 위해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완벽에 대한 강박이 조금 있어요. 물건을 사면 설명서를 다 읽기 전까진 못 써요. 그러니까 포르투갈에 간다면 포르투갈 설명서를 읽어야만 하는 거죠. 저는 콘퍼런스나 포럼, 인터뷰 같은 행사 진행·통역을 맡으면 출연진의 책을 다 읽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긴장, 불안도가 높은 편이거든요. '내가 무대 위에서 토크를 나눌 상대의 책을 안 읽고 가서 당황스러운 순간이 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있어요. 책임감도 느끼죠. 책을 읽어야 더 깊은 질문이 나오고, 진부하지 않은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하는 이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게 보이니까요. 관중은 모를 수 있어도 인터뷰이는 알아보거든요. 통역사라 대부분 원서랑 번역서를 같이 읽다 보니 일이 두 배로 많긴 해요. 저자와 얘기를 나누려면 원서를 읽어야 하는데, 청중과 소통하려면 번역서를 봐야 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영어에 매료됐던 최초의 책을 기억하나요?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을 막 밑줄 치면서 닳도록 읽었어요. 종이 사전 열심히 찾아가면서요. 12~13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스토리와 머릿속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 등장인물의 대화도 너무 좋았지만, 저는 그때부터 문장을 사랑했어요.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은데, 문장과 사랑에 빠질 때는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좋은 문장만 있어도 그 책을 사랑하게 돼요."
▶<빨강머리 앤>의 어떤 문장을 그렇게 사랑했나요?
"처음 보는 문장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게 너무 좋았어요. 주인공이 극단적인 최상급 표현도 많이 쓰거든요. 예쁘고 귀엽고 순수한 표현들이 많아요.
'The little birds sang as if it were the one day of summer in all the year.' (작은 새들은 오늘이 일 년 중 유일한 여름날인 것처럼 노래했다.),
'Anne felt that life was really not worth living without puffed sleeves.' (앤은 인생이 퍼프 소매 없이는 정말로 살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이런 문장에 줄 치고 별표를 하고, 스마일 표시도 해놓았더라고요. 저는 앤이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문장들에 꽂혀 있었구나 싶어요."
▶문장을 좋아한다는 건 어떤 건인가요?
"나민애 서울대 교수님이 한 TV 프로그램에서 하신 말 중 제가 무릎을 탁 친 게 있어요. '책을 읽는 건 설사를 하는 것과 같다'. 보통 배탈이 나면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사의 처방은 정반대거든요. 설사를 하더라도 계속 먹고 싸다 보면 나중에 장에 뭔가 남는 게 있을 건데, 그게 바로 낫는 징조라는 거죠. 독서도 그렇다는 거예요. 저는 다 읽은 책도 내용을 잊어버려서 어디 가서 읽었다고 말하는 게 거짓말 같을 때가 있어요. 이 때문에 자책하거나 난처할 때도 많았죠. '이렇게 다 까먹을 거면 책을 왜 읽지?'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딘가에는 읽은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거잖아요? 나 교수님 말씀을 듣고 '내가 무슨 AI도 아니고, 이걸 다 기억하고 꺼내 쓸 수 없을지라도 너무 나를 자책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게 됐어요. 그냥 그 시간 동안 내가 밑줄 칠 만한 문장이 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위안하게 됐죠. 저는 독서가 결국 저에게 남기는 게 그런 문장들인 것 같아요. 단어, 단어가 조합돼 처음 보는 문장이 만들어지잖아요. 인류가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처음 보는 문장은 계속 나오고요. 그런 걸 발견하는 기쁨이 큽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민감한가 봅니다.
"그런 것 같아요. 나중에 '단어를 파는 가게'를 열고 싶다는 꿈도 있어요. 예를 들면 'peace'(평화)라는 단어와 관련한 물건들을 모아놓고 파는 거죠. 물성을 느끼며 그 물건을 갖게 되면 단어와 관련한 개념과 아이디어마저 소유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잖아요.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 '감정의 물성'에도 비슷한 발상이 나와서 반가웠어요."
▶이혼 등 개인사도 있었는데요. 힘들 때 도움이 된 책이 혹시 있나요?
"소위 '인생책' 같은 걸 꼽긴 어려워요. 다만 내면 세계, 마음 공부에 입문이 된 책 한 권은 얘기하고 싶어요. 류시화 시인이 쓴 <지구별 여행자>입니다. 이 책을 고등학생 때 침대맡에 끼고 살았어요.
인도식 생각 방식을 담은 짧은 글과 일러스트가 여러 편 실려 있는, 무겁지 않은 책이에요. 집,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만 할 때 한 남학생에게 선물로 받았죠. 돌이켜보니 작은 숨구멍이 돼 준 책 같아요. 주변은 입시 경쟁으로 한창인데 제 안에선 희한하게 바깥의 소음에서 약간 거리를 두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때부터 인생이 별거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내가 나의 삶을 관망하는 자세를 갖게 됐달까요. 나중에 기자가 되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을 읽다가 인도에 가보게 됐어요. 당시엔 몰랐는데 나를 여기로 이끈 뿌리에 그 책이 있었구나 싶었어요. 요즘은 감정이나 내면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만, 제 학창 시절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저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내면에 훨씬 깊은 세계가 있고, 외면·물질 세계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어떤 본질,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전 사진 촬영을 위해 소장하고 있는 책 몇 권을 들고 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여기에도 내면과 관련된 책이 다수 보입니다.
"맞아요. <Mindfulness>, <Mindful Listening>, <Happiness> 등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나온 시리즈예요. 번역이 안 된 건 '내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직접 해야겠다' 싶은 정도로 이런 책들을 참 좋아합니다."
▶<예쁘다 예쁘다 말하면 사랑이 오고>, 이건 시집이네요?
"직업 시인이 아닌 일반인이 쓴 시집이에요. 사실 저자인 박제근 씨는 박찬호 전 야구선수의 아버지예요. 공주에서 평생 농사지으신 분인데 평소 그날그날의 느낌을 거의 매일 시로 쓰셨던 거죠. 이 책에 담긴 시는 정말 성실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이에요.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아들을 뒀는데도 화려함이라곤 느껴지질 않죠. 저자 소개에도 박 선수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아내와 공주에서 긴 세월 함께 살고 있다'고만 썼죠. 꼭 무슨 베스트셀러 작가나 유명한 시인, 엄청난 필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시를 쓰는 사람의 글에도 감동이 있어요. 우리의 레이더는 타인을 향한 경우가 많잖아요. 일기장을 열고 오늘 내가 뭐가 즐거웠고, 감사했고, 어떤 건 잘못해서 후회되고 하는 것들을 적어보면 꼭 위대한 시가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의 하루가 아니라 나의 하루를 기록하고 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사회의 많은 소음과 불만, 갈등이 줄어들 것 같아요."
▶책 속 좋아하는 한 문장을 꼽아본다면요.
"정말 좋아하는 책 <행복의 기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꼽을게요.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이 책이 지난해 10주년 기념 개정판이 나오면서 저자인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님이 여러 군데에 출연하셨는데, 서 교수님 나온 방송을 설거지할 때, 운전할 때 틀어놓고 수시로 봤어요. 저는 책으로만 만났지만, 이분이 지면에 담지 못한 뒷이야기나 행간의 의미 등이 궁금했거든요. 유튜브 같은 영상이 발달한 요즘이 저는 독서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인 것 같아요.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콘텐츠를 통해 여운을 느끼고 입체적인 독서를 할 수 있죠. 동영상 플랫폼과 숏폼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영상 매체가 발달한다고 해서 인쇄 매체가 등한시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유튜브를 보고 호기심이 생기고 책의 매력을 느껴 구매를 할 수도 있고요."
▶독자들을 위한 추천책 10권을 부탁합니다.
1. <미식가의 어원 사전> | 앨버트 잭-'언어 덕후'로서 재밌게 읽은 책입니다. '후무스' '케밥' '케첩' 등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음식 이름의 기원을 살피는 책이에요. '미식의 시대'에 식사 자리에서 대화거리도 더 풍성해질 수 있을걸요?
2.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아잔 브라흐마-영국 출신 승려가 태국의 전설적인 스님 밑에서 수행하며 깨우친 불교적 가르침을 알기 쉽게 썼어요. 읽고 또 읽고 명상 모임 친구들에게도 추천한 책이에요.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종류의 감정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음주단속 하는 기분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그리고 어느새 얼굴엔 부처의 미소가.
3. <백만장자와 승려> | 비보르 쿠마르 싱-행복에 이르는 길이 길고 두꺼워서야 되겠나. 얇고 가벼운 책에 정수만을 담았어요. 부의 최정점에 선 억만장자 기업가와 사찰에서 내려온 라마 주지승이 21일간 나눈 대화의 기록인데요.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의 균형 속 평온함에 대해 논하고 있어요. 평생을 기억해도 좋을 황금 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니, 빨리 읽기보단 천천히 곱씹으며 읽길 권해요.
4. <이해인의 말> | 이해인-이해인 수녀님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수녀님의 말과 글을 참 아끼고 사랑해요. 그야말로 예쁘고 맑은 마음의 샘에서 톡하고 떨어진 한 방울의 표현이 나의 지치고 얼룩진 구석을 닦아주는 마법을 부린달까. 그중에서도 이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돼 있어서, 정말로 수녀님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느낌이 나요. 수녀님 특유의 말투까지도 생생해서 읽다 보면 오디오 지원이 되는 것만 같고요. 평생 피할 수 없는 문제인 인간관계에 대한 지혜를 얻게 될 거예요.
5. <법관의 일> | 송민경-법은 법조인이 다루는 거라고 치부하기 쉬운데, 사실 우리는 누구나 법의 토양 위에서 살고 있기에 법을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고요. 이 책은 흥미롭게도 법관의 시점을 소설가의 시점과 비교하며 저자인 판사가 자신의 하루하루와 그 안의 숨겨진 고충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어요. 특히 필력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6. <기후위기인간> | 구희-환경 관련 책은 꼭 한 권 넣고 싶어서 많이 고민했는데, 일부러 가장 거부감이 들지 않는 쉬운 걸로 골랐어요. 만화책입니다. 복잡한 과학 이론이나 통계는 최소화했고, 귀여운 그림과 함께 진짜 그냥 집에 앉아있는 평범한 독자의 시점에서 모든 걸 와닿게 설명해줘요.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혹은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어린아이들과 같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예요.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기후 관련 문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거예요.
7.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 강세형-강세형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특히 이 책에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소설,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해서 반가워요. 마치 아는 사람이 TV에 나온 것처럼요.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라플위클리처럼 콘텐츠 관련 방송을 많이 하다 보니 평소에도 연관성 있는 책을 일부러 들춰보곤 하는데, 이런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게 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한 거죠.
8.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 제임스 해거티-결국 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문자 그대로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좋아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자신의 부고를 직접 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독특한 책이에요. 부고를 작성한다는 게 결국은 삶을 작성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겠죠. 당장 죽을 건 아니지만, 메멘토 모리잖아요. 언젠가는 모두가 맞이하게 될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되새겨보는 거죠. 죽음이야말로 오늘이 빚지고 있는 가장 큰 스승이기에 책장에 죽음에 관한 책들도 상당하네요.
9. <우리가 할 일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뿐이다> | 주광첸-나는 왜 돈도 되지 않는 시를 읽고, 가질 수도 없는 그림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자연을 즐기는가에 대해 사무치는 답변이에요. 이해관계로 점철된 현실 세상에서 실용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오로지 심미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 역시 소중함을 알 수 있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삶을 아름답게 영위하고자 하는 의지, 그 꺼지기 쉬운 소망에 불을 밝혀준답니다. 같은 작가의 책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미학책에 더 가깝다면 이 책은 훨씬 편하게 읽혀요.
10. <진리의 발견> | 마리아 포포바-추천 목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완독한 책으로 엄청난 두께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다만 거창한 한국어 제목처럼 (원제는 Figuring) 엄청나게 대단한 진리를 발견하는 책은 아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20세기 위인들의 수많은 TMI(Too Much Information, 사족)를 알아가는 책이죠. 진실은 디테일에 있으니까요. 찰스 다윈이나 에밀리 디킨슨 등 시대를 앞서 나간 10명의 인물들(그 가운데 여성이 7명이란 점도 포인트!)의 자잘한 조각들을 쫓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를 때리는 퍼즐이 완성되는 독서의 경험이 펼쳐진답니다.
'독설(讀說)'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보는 코너입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