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암센터·美 NCI, 암 진화 경로 추적
양한광 “500만명 데이터 적극 활용할것”
암이 생긴 뒤 치료하는 시대를 넘어 발생 자체를 막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과 미국 연구진은 정상 세포가 암으로 변하기 직전인 ‘전암세포’를 AI 기반 3차원 입체 지도로 추적해 제거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동시에 헬리코박터균 치료만으로 위암 발생 위험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다는 대규모 임상 성과도 나오면서 암 예방 기술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국립암센터는 17일 개원 25주년을 맞아 ‘제18회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차세대 암 관리 핵심 성과를 발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와 일본 의료연구개발기구(AMED), 중국 북경대학교암병원 등 글로벌 연구기관의 석학들이 참석한 가운데 암 예방과 조기진단, 정밀의료, AI 기반 치료법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날 가장 주목받은 성과는 암이 생기기 전에 원인을 원천 봉쇄하는 예방 연구였다. 최일주 국립암센터 위암센터 교수는 국제암연구소(IARC)와 함께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위암 예방 임상시험인 ‘헬퍼(HELPER) 연구’의 데이터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초기 위암 수술을 받은 환자가 헬리코박터균을 없애는 약을 복용했을 때 위암이 재발할 위험은 50% 줄어들었다. 특히 위암 환자의 부모나 형제, 자매 등 직계가족이 검사를 통해 헬리코박터균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 균을 죽이는 약물 치료를 받았을 때는 위암 발병 위험이 55%나 급감했다.
최 교수팀은 항생제 내성 등으로 인해 균이 일부 남아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약물 치료를 통해 헬리코박터균이 몸 안에서 완전히 박멸된 환자들만 따로 분석했을 때는 위암 예방 효과가 최대 70%에 달한다는 근거도 제시했다.
최 교수는 “일반인 1만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장기 추적 조사가 마무리되면 균이 없는 사람의 위내시경 검사 간격을 늘리는 등 전 국민 대상의 국가 위암 검진 가이드라인 표준을 새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AI를 활용해 암 진화 과정을 세포 수준에서 추적하는 정밀의료 성과도 나왔다. 미국 정부가 암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국가적으로 추진 중인 암 정복 프로젝트 캔서문샷의 핵심 과제이자, 국립암센터가 협력하고 있는 ‘인간 종양 지도망(HTAN)’의 전암세포 추적 연구가 대표적이다. HTAN은 암의 탄생부터 전이, 치료저항성 획득까지의 전 과정을 3차원 아틀라스(디지털 지도)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이날 켄 라우 밴더빌트대 교수는 HTAN과 관련해 대장 용종이 악성 암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세포 수준에서 추적한 결과를 발표했다. 초기 용종은 여러 세포집단이 섞인 상태로 시작되지만 주변 면역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특정 세포군이 선택적으로 증식하며 단일 우세 암세포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라우 교수는 “대장암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세포가 암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포 집단이 주변 면역세포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선택되는 진화 단계를 거쳐 발생한다”며 “이 과정에서 우리 몸의 면역감시 시스템을 교묘하게 피하고 세포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특정 세포들이 암 진행을 촉진하는 주범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구축 중인 AI 기반의 3차원 입체 지도를 활용하면 암이 완전히 발생하기 전 단계에서 개입해 진행을 차단하는 새로운 예방 치료 전략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암의 발생 기전을 뒤흔들 정밀지도와 관련해 한미 공동 연구가 성사된 데에는 우리나라 의료진이 축적해온 임상 데이터의 힘이 작용했다. 황태현 밴더빌트대 교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NCI의 핵심 프로젝트를 한국 기관과 함께 연구하기로 한 배경에는 국립암센터의 인프라와 세계 최고 수준의 임상 데이터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이 AI로 암을 정복하겠다면서 신약 개발에 뛰어들고 있지만 이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방대한 환자 자료”라고 말했다.
다만 황 교수는 이러한 독점적 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오래 열려있지 않을 것이란 점을 명확히 했다. 거대 ICT 기업들이 의료 분야에 직접 진출해 환자군을 확보하기 시작하면 한국이 가진 데이터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글로벌 기업들이 독자적인 데이터망을 완성하기 전, 우리에게 남은 골든타임은 6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며 “환자 데이터를 AI가 학습할 수 있는 3차원 공간 지도로 빠르게 가공해내야만 글로벌 암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말했다.
기초 바이오 기술과 국가 암 데이터의 연계 필요성에 대해 국립암센터 역시 단순한 자료 보관을 넘어 AI 맞춤형 데이터로 체질을 개선하고 정부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총력을 다할 방침이다.
양한광 국립암센터 원장은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암 검진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덕분에 500만명에 달하는 등록 데이터를 갖고 있다”며 “여기에 유전자 분석(NGS) 데이터가 맞물리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양질의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에 ‘국가 암 AI 데이터센터’ 인프라와 자체 서버 구축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암을 발생 전에 예측하고 통제하는 미래 의학을 선도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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