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4 weeks ago 6

국가대표 저음 성악가 3인, 출연한 '싱 로우 앤 소프트'
연광철, 사무엘윤, 김기훈 출연
세계 무대 누빈 목소리에 관객석 뜨거운 반응
2부 현악 앙상블 구성이 불러 온 음향적 한계 아쉬워

"한국은 성악적으로 축복 받은 나라" 2023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단원들에게 명예 지휘자로 추대된 정명훈이 이탈리아 공영 방송사 RAI(Radio Audizioni Italiane)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평소 한국이 세계 음악 시장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로 '성악'을 꼽았다. 특히, 저음 성악가들의 활약이 국제적이라고 강조해왔다. 그의 평가를 증명하듯, 지난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오른 베이스 연광철,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윤, 바리톤 김기훈의 가창력은 세계적이었다.

1부 오페라 황홀경

공연의 전반부는 빈 슈타츠오퍼, 뉴욕 메트로폴리탄, 런던 로열 오페라와 바그너 오페라의 성지 바이로이트를 누빈 세계 정상급 성악가 3인을 위한 무대였다. 공연 전반부는 이들이 실제 오페라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배역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몄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 <리골레토>, <돈 카를로>, <오텔로>와 바그너의 <탄호이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플라잉 더치맨)>, <라인의 황금> 등 7편의 작품의 주요 장면에 등장하는 아리아를 연기와 함께 노래했다.

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연광철은 베르디 <돈 카를로> 중, 필립 왕의 아리아 '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 없네'를 불렀다. 이 아리아는 권력자의 외로움과 비탄을 노래하는 곡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베이스 아리아로 손꼽힌다. 자신을 처음 본 왕비(엘리자베타)가 늙은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는 가사를 백발의 연광철이 노래한 대목에서, 나이 든 절대 군주의 고독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아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No, amor per me non ha)"라는 마지막 가사를 피아니시모로 노래하는 연광철의 해석에는 고독에 대한 체념이 담겨 있었다.

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연광철과 사무엘윤이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자객 스파라푸칠레와 리골레토로 분한 장면은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시간이었다. 이에 따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한국인 궁정 가수(캄머쟁어) 두 명이 동시에 무대에서 노래한 최초의 한국 공연장이 됐다. 이 둘이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은, 독일 바이로이트 극장과 스페인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에서 열린 바그너 오페라 이후 처음이다.

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오페라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 아리아 두 곡을 연이어 부른 김기훈은 특유의 울부짖는듯한 진성으로 힘이 넘치는 열창을 선보였다. 첫 곡 'Per me giunto(나의 최후의 날)'에 이어 'Io morro(나는 죽는다네)'를 부르기 전, 연주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객석에선 브라보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가창력이 객석을 뜨겁게 달궜기 때문이다. 그의 에너지 넘치는 가창력은 '한국 바리톤 성부는 김기훈의 시대'임을 입증하기 충분했다.

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윤은 <오텔로>의 이아고, <라인의 황금>의 알베리히 역을 노래하며 각 역할의 캐릭터에 맞는 표정과 동작 연기로 무대를 장악했다. 오페라 역을 통틀어 가장 악역으로 손꼽히는 이아고의 아리아를 부를 때는 섬뜩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다. 무대를 넓게 활보하며 노래한 알베리히의 아리아 '나는 이제 자유인가?'에서 그가 왜 세계적 연출자들의 선택을 받는 성악가인지 알 수 있었다.

사무엘윤은 2016년 미국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이 역을 노래하고, 한 미국 오페라 전문 매체로부터 바그너가 의도한 '차갑고 등골 오싹한(Darkly and bone chilling) 알베리히'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2부 관객 집중력 빼앗은 음향적 아쉬움

2부는, 슈베르트와 브람스의 독일 가곡, 김주원, 윤학준, 김동진의 한국 가곡으로 꾸며졌다. 그런데, 첼로 10대와 더블베이스 2대로 구성된 현악 앙상블 편성이 공연의 옥에 티로 전락했다. 저음 현악기 12대가 울려내는 배음에 성악가들의 중저음이 묻혀 버린 것이다. 뜨거웠던 장내 분위기는 1부와 비교해 온도차가 느껴졌다.

김주원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김기훈이 우수에 젖은 음색으로 애잔한 가사를 표현했으나, 절절한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 반주가 백미인 이 곡의 전주부터, 음악이 다소 느슨하고 편안하게만 들렸다. 저음 악기로만 구성된 앙상블을 위한 편곡을 거친서 온 결과였다.

연륜과 에너지, 연기력... '3인 3색' 예술적 경지 선보인 무대

저음 가수인 바리톤, 베이스(바리톤)를 위한 공연에서 저음악기로만 구성된 현악 앙상블의 출연은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 2명이 1개의 보면대를 보는 것을 '풀트'라 일컫는다. 보통 10대의 첼로(5풀트)를 포함하는 현악 군은 60인조 편성으로, 100인조 대편성 오케스트라 구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날은 12대의 저음 현악기로만 앙상블을 구성해 전통적 균형을 따르지 않았다.

전통적 자동차 브랜드들이 스포츠카와 세단, SUV, 승합차를 따로 생산하듯, 시대를 관통해 온 전통적 악기 구성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각자의 역할과 기능이 분명하다.

역사적인 공연에 대한 사실 확인이 부족했던 대목도 아쉽다. 공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세계 공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스리 테너(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콘서트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정보가 프로그램 북에서 전달됐다. 스리 테너 콘서트의 첫 시작은 '올림픽 전야제' 무대가 아니다. 1990년 이탈리아 로마 월드컵 결승 전야인 7월 7일, 로마의 고대 유적지 카라칼라 욕장(Bath of Caracalla)에서 열렸다. 주빈 메타가 지휘한 로마 시립극장과 마조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함께했다.

전통적으로, 출연자(배우), 관객, 공연장(극장)을 두고, 공연의 3요소라 일컫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기획'이 공연의 성패를 좌우한다. 연광철, 사무엘윤, 김기훈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저음 성악가 세 명이 함께 출연한 무대는 한국 공연 역사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훌륭한 기획 의도에서 시작된 '싱 로우 앤 소프트'가 부분적 시행착오를 거쳐, 더 발전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해본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