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는 가장 많은 편수의 일본 영화가 초청을 받았다. 한·중·일 기준으로는 평균적으로 가장 적은 영화가 상영되었던 예년에 비하면 크나큰 반전이다. 일본 영화의 변화는 비단 편수뿐만이 아니다. 영화들은 완성도와 주제에 있어서 역시 전반적으로 풍성하고 수려하다. 작은 일상을 비추는 영화들에서부터 장르 영화, 그리고 삶과 죽음을 전위적으로 그리는 영화들까지 이번 영화제에서 만난 일본 영화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미이케 다카시, 키타노 다케시 등이 활약하던 1990년대 작가주의 영화들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한다.
<해피엔드>(네오 소라), <새벽의 모든>(미야케 쇼)을 포함 최근 한국에서 개봉된 일본 영화들이 그렇듯, 이번 상영작들 역시 저예산 프로젝트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주제와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실험적이고 독특한 시도가 가득하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2014)와 <종이달>(2015)로 널리 알려진 요시다 다이하치의 신작 <적이 온다> 역시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영화는 사계절로 나뉘어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흑백으로 촬영되었다. 우디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다이하치 감독은 음식 장면이 많아 컬러로 촬영을 할까도 고민했지만 주인공 키스케가 만지고 바라보는 모든 사물과 인물에 "'미스터리’를 첨가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의 음식 재료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객들이 직접 색감과 상상을 더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77세의 은퇴한 교수, 키스케(나가츠카 쿄조)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정성껏 쌀을 씻고, 연어를 굽고, 완성된 식사를 정갈하게 담아 아침을 완성한다. 그렇게 완벽한 아침으로 그의 하루가 시작되면 오후는 소일거리로 쓰는 월간지 기사를 집필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점심은 주로 소바를 선택한다. 역시 정성을 담아 면을 삶고 찬물에 담갔다가 그릇에 담아낸다. 반찬으로는 주로 츠케모노(채소절임)를 곁들인다.
이쯤 되면 이 영화 역시 수많은 먹방 테마의 일본 영화들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상 음식은 그가 현재의 무료한 삶에서 유일하게 정성을 들이는,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현실에 대한 표식이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월간지에 쓰는 작은 기사로 생계를 연명하고 있으며 남은 돈이 얼마 남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남은 돈만큼만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는 그의 늙은 육체, 그러나 살아 있는 육체가 할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행위다.
여전히 키스케의 평온한 일상은 계속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성스러운 식사를 준비하고 시장을 보러 나가며 때때로 집을 방문하는 여제자를 위해 프랑스식 정찬도 마련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살을 하기로 한다.
<적이 온다(Teki Cometh)>는 연명하는 삶에 대한 고통스러움을 관조적으로 그린다. 동시에 영화는 자살에 실패한 키스케가 직후에 받게 되는 '적의 침공’에 대한 이메일을 통해 영화적 반전을 드러낸다. 이메일은 '적’이 오고 있으며 남쪽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모두 공멸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팸이라고 무시했던 그는 이메일의 예고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진짜 공격이라는 것을 그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인터뷰에 따르면 <적이 온다>는 다이하치가 30대에 읽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30대에 읽었을 때는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못했지만 30여년이 흘러 코로나 기간에 다시 읽었을 때 크게 공감했고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팬데믹 기간에 이 소설이 다시 읽혔다는 그의 답변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 키스케가 60대의 다이하치 감독 본인, 즉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아티스트의 페르소나이지 않을까 하는 추정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키스케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였지만 그의 지식과 교양은 현재 이 세대에 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늙어버린 지식인이고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음식을 정성껏 만들고 먹는 행위뿐이다. 정작 그의 눈앞에 닥친 재앙, 즉 팬데믹과 같은 재앙이 닥쳤을 때 그는 잠시 두려움에 주춤하지만 결국 그 재앙에 맞서 투쟁하기로 한다. 그것 역시 용기가 나서라기 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에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일상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적이 온다>는 다이하치식(式) 투쟁이다. 때로는 실패한 그의 영화처럼, 혹은 (지금 이 작품과 같이) 여전히 세대와 소통하는 영화처럼, 그는 팬데믹에서 살아남았듯 그의 예술인 영화에서도 굳건한 삶을 이어 나가는 듯하다. 세대와 문화의 변화, 그리고 팬데믹의 공격을 겪고 난 감독은 죽음과 일상, 그리고 노년의 삶을 대단한 깊이와 성찰을 담아 그만의 랩소디로 만들어냈다. 반가운 소식은 이 귀한 작품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다는 사실이다. 상영 후 우디네의 극장을 가득 채운 기립 박수가 전주에서도 이어질지 과연 기대가 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