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명품 자동차 회사는 어쩌다 식품기업이 됐나

1 day ago 2

장기침체의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
산업구조나 시장환경 한국도 판박이

유재동 산업1부장

유재동 산업1부장
폭스바겐이 소시지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얘기다. 1970년대 공장 근로자들의 급식용으로 생산한 물량을 시중에도 판매하기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넘었다. 소시지에 대한 회사의 애정과 자부심은 본업인 자동차에 필적한다. 소시지는 포장지에 ‘폭스바겐의 오리지널 부품’이라고 적혀 있고 실제 자동차 부품처럼 고유 시리얼 번호도 부여받았다. 폭스바겐은 이와 곁들일 케첩도 함께 만들어 파는데, 무슨 자동차 첨단기술이라도 되는 양 이들 식품의 레시피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소시지는 인기가 좋아 작년 한 해만 855만 개가 팔렸다. 폭스바겐그룹의 전체 자동차 판매량(약 900만 대)을 곧 추월할 기세다. 물론 단가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두 제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독일 언론들은 이를 자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신호라고 여긴다. 지난해 폭스바겐의 영업이익과 차량 판매량은 각각 15%, 3.5% 줄었다. 주업인 자동차 사업이 부진하자, 부업인 식품업과 방산업 등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폭스바겐의 실적 악화는 지역 경제로 전염되고 있다. 계열사 아우디 공장이 있는 남부 잉골슈타트는 시(市)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모회사의 사세가 기울면서 빚더미에 빠졌다. 주민들은 한때 부유했던 도시를 이제 자조적으로 ‘독일의 디트로이트’라고 부른다.

폭스바겐의 문제는 수렁에 빠진 독일 경제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독일은 최근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냈다. ‘유럽 경제의 기관차’로 불리던 나라가 이렇게 큰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리스크 분산’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제조업이 강한 독일의 최대 교역국은 오랫동안 중국이었다. 중국이 고성장하고 독일 제품을 많이 사들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젠 고객에서 경쟁자로 변모하면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공급은 러시아에 지나치게 기댄 게 화근이 됐다. 독일은 천연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수입해 왔는데 전쟁 등으로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고 생산 비용이 치솟는 위기를 겪고 있다.

시대 변화에는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은 기존에 강점이 있던 전통 제조업에만 안주하다가 배터리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최근 10여 년간 미국과 중국에 철저히 밀렸다. 기술혁신과 산업구조 재편에 소극적인 경향은 최대 경쟁력이었던 자동차 분야에서 가장 큰 생채기를 냈다. 독일은 그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내연기관 차량에만 치중한 나머지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흐름이 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뒤처졌다. 최근 막강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신생 빅테크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휘젓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이에 대항할 만한 기업을 딱히 떠올리기 힘들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숨 막히는 규제 환경, 복잡한 행정 절차 역시 독일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독일의 문제는 주어만 한국으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다. 높은 수출 의존도와 낮은 에너지 자립도, 제조업 편중, 혁신의 부족, 규제 장벽, 제로에 수렴하는 성장률까지 한국은 독일보다 사정이 나은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이 탄탄한 펀더멘털을 앞세워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구세주로 칭송받던 게 불과 10여 년 전이다. 우리도 세상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경제 열등생’의 처지로 전락할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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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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