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건보 포퓰리즘, 이런 약탈도 없다

4 weeks ago 8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건강보험만큼 선거철마다 만만한 돈주머니가 없다. 병원비와 건강이라는, 국민이 가장 민감해하는 이슈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지출 확대를 약속하고 유권자는 표를 던진다.

이번에는 간병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앞다퉈 간병비 건강보험 적용을 약속했다. 나이 든 부모를 요양병원에 모시며 간병 부담을 짊어지는 건 누구에게도 남 일이 아니다. 반응이 즉각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낸 건보료로 부모 간병비를 댄다’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정치권과 유권자 모두를 합리화시킨다.

선거 때마다 지출 확대 공약

건강보험을 ‘효도 보험’으로까지 써 먹겠다면 적어도 재원 마련과 책임 분담에 대한 설계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런 고민 없이 선심성 공약만 내놓는다면 건보 보장성 확대는 기분 좋은 약속이 아니라 미래를 갉아먹는 약탈이 될 수 있다.

간병비 건보 적용 공약의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이다. 당장 내년에 3000억 원 안팎 건보 적자가 예상된다. 2028년에는 연간 적자액이 1조6000억 원을 넘어서면서 누적 적립금도 바닥날 것으로 전망된다. 요양병원 환자 중증도를 5단계로 나눠, 가장 심한 1∼3단계에만 건보를 적용하더라도 매년 최소 15조 원이 추가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2064년에 고갈된다는 국민연금 걱정이 사치로 느껴진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건보 지출 확대 카드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혜택을 늘려 표를 얻고, 재정에 구멍이 나면 그때 가서 건보료를 올리면 된다. 건보료 인상은 증세와 달리 법 개정이 필요 없어 국회 문턱을 넘지 않아도 된다. 정부가 적당히 요율만 조정하면 된다. 그마저도 지지율이 떨어질 것 같으면 다음 정권에 떠넘기면 그만이다. 정치적 책임은 희미해지고 표는 손에 들어온다. 이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 있을까.

역대 정권은 보수든 진보든 이 유혹을 피해 가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노년층을 겨냥해 임플란트와 틀니를 건강보험에 포함했다. 문재인 정부는 ‘문재인 케어’라는 이름으로 상급 병실료, 자기공명영상(MRI) 등 비급여 항목을 대거 급여화했다. 전형적인 건보 포퓰리즘이다. 윤석열 정부는 의정 갈등을 수습하겠다며 의료수가 조정 등 뒤늦은 개혁을 추진하다가 건보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어설픈 개혁이 더 심각한 포퓰리즘을 낳았다. 이렇다 보니 정작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할 건보 재정이 탕진되고 있다. 목숨이 달린 중증질환, 소아암, 희소병 환자들에 대한 급여 확대는 번번이 외면당한다.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필수분야 지원 확대가 제자리를 맴돌면서 좌절하는 흉부외과 의사는 탈모 클리닉을 연다. 반면 MRI, 임플란트, 틀니처럼 불특정 다수가 조금씩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항목에는 조 단위 지출이 펑펑 나간다.

이런 구조로는 건보 존립마저 위태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지금, 의료와 돌봄 수요는 더욱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건보 지출 40%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층에 집중됐다. 장기 요양보험 지출은 불과 5년 만에 두 배로 뛰었다. 반면 건보 재정을 떠받칠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감소세다. 잠재 성장률 둔화로 국민소득도 정체되고 있다. 소득 대비로 매겨지는 건보료 파이가 커지기 어려운 이유다.

건강보험은 더 이상 만만한 정치인 돈주머니가 돼선 안 된다. 지금처럼 재정 고민은 뒤로 미룬 채 혜택만 늘리는 방식은 약탈에 가깝다. 선심성 한탕 정책으로 건보 재정이 바닥나면 책임은 고스란히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된다. 이런 구조로는 건보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다. 언제까지 숫자 계산 없는 정치, 책임 외면하는 정책으로 일관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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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정책사회부장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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