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BC방송은 2017년 4월 LA 폭동 25주년을 다루는 기사에서 이같이 평가했다. 한인들에게 LA 폭동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흑인인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지면서 촉발된 이 폭동에서 한인들은 단지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단 이유로 약탈과 방화 대상이 됐다. 한인타운 내 상점 2800여 곳이 파괴됐고, 4억 달러가량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심지어 경찰은 이른바 ‘백인 동네’ 보호에 집중했고, 언론에선 ‘흑백 갈등’ 대신 ‘한인-흑인 갈등’ 구도로 몰아가려고도 했다. 말 그대로 한인은 ‘희생양’이나 다름없었다.
美 한인들, LA 폭동 겪으며 정치에 관심
하지만 LA 폭동은 한인들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로도 작용했다. 당시 한인들은 억울함 속에서도 ‘루프톱(옥상) 코리안’으로 불린 자경단을 구성해 한인타운을 지켰다. 자경단의 적극적이지만 절제된 대응, 폭도들이 물러간 뒤 거리를 정리하는 모습은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위상을 높였다. 당시 조지 H 부시 대통령도 한인타운을 방문해 한인들을 위로, 격려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전까지는 미국 정치와 사회에는 별다른 관심 없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했던 한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으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이다.특히 당시 한인들이 많이 살던 LA, 뉴욕, 시카고에서 이런 모습이 활발히 나타났다. 30여 년간 미국 정계에서 한인들의 정치 및 선거 참여 확대 활동을 펼쳐 온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LA 폭동을 계기로 ‘선거에 꼭 참여하자’, ‘정책을 적극 제안하자’는 움직임이 한인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런 미국 정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2010년대 이후 앤디 김 상원의원(민주당), 영 김 하원의원(공화당), 데이브 민 하원의원(민주당), 매릴린 순자 스트리클런드 하원의원(민주당), 미셸 박 스틸 전 하원의원(공화당) 같은 한인 연방 의원들이 배출되는 토양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들 한인 의원은 미국의 다양한 소수 계층을 위한 법안 발의에도 나서고 있다. 여기에는 시민권을 취득 못 한 입양인을 보호하고 복지 혜택을 주는 ‘입양인 시민권법’, 소수인종에게 발병률이 높은 희귀질환 관련 지원을 늘리는 ‘건강 형평성과 희귀질환법’, 여성과 소수인종, 장애인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활동을 돕기 위한 ‘여성 및 소수자 STEM 역량 강화법’ 등이 포함돼 있다. 미국 사회의 통합을 위해 나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분열 부추겼던 트럼프 주니어최근 LA에서 발생한 불법 이민자 강경 단속에 대한 반대 시위가 격해지던 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갑자기 루프톱 코리안의 사진을 올렸다. 또 “한인들이 옥상에 오르자 폭동이 멈췄다”고 썼다.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단 해석이 나왔다. LA 폭동 재현 가능성을 걱정하던 한인들의 불안감은 증폭됐고, LA한인회는 비판 성명을 냈다.
트럼프 주니어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책임 있는 모습 혹은 한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싶었다면 루프톱 코리안보단 LA 폭동 뒤 한인들이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현재 한인 의원들의 활동에 주목했어야 한다.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한 소수인종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모습의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추기는 ‘편 가르기’의 예로 미국 한인들의 모습은 적절하지 않다.
이세형 국제부장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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