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역사를 빠짐없이 적은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역사서 중 하나로 꼽힌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 수많은 재난과 환란에도 실록 원본이 보존될 수 있었던 건 ‘분산 보관’ 정책 덕분. 조선은 실록 복제본을 여러 부 만들어 전국 각지의 깊은 산속에 보관하고 인근 사찰에 이를 지키도록 했다. 그중 하나가 1606년 강원 평창군 오대산 일대에 들어선 뒤 월정사의 관리를 받아온 오대산 사고(史庫)다.
1일 개관하는 강원 평창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오대산이 품었던 <조선왕조실록>(오대산 사고본)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상시 전시하는 공간은 전국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개관식을 하루 앞두고 찾은 박물관에서는 실록 원본을 가까운 거리에서 종이 질감까지 상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현존하는 실록 중 수난을 가장 많이 겪은 판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이 불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대산 사고본은 수정·띄우기·첨가·삭제 등을 지시하는 교정부호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정 사항을 표시한 ‘빨간 펜 자국’까지 남아 있다는 얘기다.
원래 실록을 제작할 때는 원고를 교정해 다시 제작한 뒤 교정부호가 남아 있는 초고는 폐기하는 게 원칙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임진왜란 이후 물자가 부족해 교정부호가 남아 있는 초고를 그대로 보관한 것 같다”며 “실록의 교정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오대산 사고에서 실록과 함께 보관하던 의궤도 만나볼 수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한 일종의 ‘행사 보고서’다. 국왕의 즉위, 혼례, 장례 등 각종 행사의 상세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어 시각 기록물로 가치가 높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전관 개관을 기념하는 특별전 ‘오대산사고 가는 길’이 오는 7월 13일까지 열린다. 추사 김정희가 실록 보존 작업에 참여한 뒤 기록한 방명록 등 오대산 사고 역사를 40여 점의 유물로 보여준다.
다만 오대산 사고본 대부분은 원래 실록을 소장하고 있던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옛날 사고 자리에 실록을 보관한다는 박물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대목이다. 김정임 관장은 “아직 수장고 시설이 완비돼 있지 않지만 몇 년 내로 시설을 확보해 오대산 사고본을 모두 가져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평창=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