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찾아간 서울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연습실에선 헬기 소리와 함께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국국립발레단 리드 수석무용수 이상은(38)이 서울시발레단원들과 함께 요한 잉거의 작품 '워킹매드' 동작을 맞추고 있었다.
연습실에 설치된 커다란 벽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 씬, 그리고 벽에 남녀 무용수가 몸을 부딪치다가 남자 무용수만 벽위에 기어올라 다른 세상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다. 이상은이 객원 무용수로 출연하는 '워킹매드'는 블리스라는 작품과 함께 더블빌(두 가지 작품을 한 무대에 올리는 것)로 오는 5월 9일~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다.
이상은은 10살때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을 본 뒤 발레를 배웠다. 꿈의 발레단에 입단한 게 2005년, 유럽 무용단으로 옮겨 20년간 무용수로 살았다. 매년 고전 발레와 컨템퍼러리 작품 골고루 갈라 무대에 섰지만, 해외 무용단으로 진출한 뒤 컨템퍼러리 전막 작품으로 한국 관객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워킹매드의 안무가 요한 잉거는 "이상은의 춤에 사랑에 빠져 내가 항상 따라다녔던 무용수"라고 했다. 연습실에서 그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한 잉거의 작품은 여러 차례 경험했어요. 이번에 출연하는 '워킹매드'는 2013년 드레스덴 젬퍼 오퍼 발레단에서 대역으로 배웠어요. 2016년에는 주역이 돼서 비로소 무대에 올랐죠. 거의 10년만에 한국에 와서 다시 배우고 있어서 매우 뜻깊고 즐겁습니다."
서울시발레단은 지난해부터 이상은이 몸담고 있는 영국국립발레단에 직접 날아가 그와 무대에 서고 싶다고 설득했다. 이상은이 젬퍼 오퍼에서 같이 일했던 예술감독이 영국국립발레단에 부임하자 함께 입단한 시점이 1년 남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드레스덴 젬퍼 오퍼 발레단에서 다양한 컨템퍼러리 발레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라는 서울시발레단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리는 무용수였다고. 오하드 나하린, 윌리엄 포사이스 등 살아있는 전설과 함께 소통하고 춤췄던 이상은의 경험이 단원들에게는 자극이 될 수도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었을 때 컨템퍼러리 작품을 접할 수 있었어요. '디스 이즈 모던'이라는 작품을 하고나니 유럽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젬퍼 오퍼에 입단한게 2010년이고 다국적 발레단이었기에 더 제약없이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었어요."
베테랑 무용수지만 한국 무용수와 협업하는 일은 유니버설발레단을 나온 뒤 처음이다. "갈라 무대는 외국 무용수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난해 성남아트센터에서는 '빈사의 백조'로 혼자 무대에 섰어요. 그런데 서울시발레단에서는 몇 주동안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주어니지 새롭고 재밌어요."
이상은이 말하는 요한 잉거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말이 필요없는 작품이란게 가장 큰 특징 같아요. 한 인물의 여정을 따라가는 작품이 많은데요. 고독한 시간, 어렸을 때의 기억, 남들은 앞서 가는데 나는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 등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공감할 이야기를 잘 묘사하는 작품들이죠."
고전 발레와 컨템퍼러리 발레를 나누는 건 이제 그에겐 큰 의미가 없다. "다 재밌어요. 고전 발레에서는 바닥을 강하게 눌러야 무게감이 없어 보이는게 가능한데요, 컨템퍼러리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져서 완전히 다른 기술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본질은 같아요. 작품을 통해 여러번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움직임의 이면을 터득하게 되죠."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