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원화에 대한 국제적인 수요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결국 내수용이다. 통화주권 약화, 즉 달러라이제이션(달러 지배)을 방어하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필요하다는 견해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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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이병목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
韓, 달러라이제이션 가능성 낮아…‘달러 스코’는 규제 필요
이병목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은 최근 이데일라와 만나 “기본적으로 달러 수요는 환율의 방향성, 해외송금 수요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며 “우리나라에선 일상 거래에서 원화가 지급결제 수단으로 가장 싸고 효율적이면서 편리하다. 달러라이제이션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 도입을 위한 일종의 ‘마케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예를 들어 국내에서 달러를 사는 이유는 일상적인 지급수단이 아닌 달러화 가치 상승 기대에 따른 투자나 자금 출처 은닉 등의 목적으로 보유하려는 수요 때문”이라며 “(달러) 스테이블코인도 해외 가상자산 거래 등 투자 목적으로 보유하는 수요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터키,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와 같이 자국 통화 가치가 극도로 불안정한 나라에서는 달러를 자국 화폐 대신 사용하거나 병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록 원화가 기축 통화는 아니지만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고, 지급결제 인프라의 경우 선진국보다 잘 갖춰져 있는 만큼 달러라이제이션이 발생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다.
이 국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나오면 원화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주장에도 동의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통화의 형태가 바뀐다고 해서 그 통화에 대한 수요가 변화하는 건 아니다”라며 “결국 전 세계 경제 시스템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따라 가는 것이다. 그게 실물 화폐든 디지털화된 토큰이든 똑같다.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우려를 표했다. 통화 주권이나 원화 수요와 별개로 외환규제를 우회하는 용도로 악용될 수 있어서다. 이 국장은 “국내에서 USDT 등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가상자산 투자자들 사이에서 국내와 해외 거래소 간 이전을 통해 거래수단 등으로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 사실상 미 달러화를 자유롭게 국외로 이전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연간 10만달러가 넘는 해외 송금의 경우 신고 의무가 있으나,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10만달러 이상 사서 가상자산을 구매한 후 다시 미국 시장에서 팔아 달러로 바꿀 경우 국내 외환 규제를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자금 세탁이나 편법 증여 가능성은 정책·감독기관 및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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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이병목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
화폐의 디지털화는 대세…‘프로그래머블 머니’ 실험 진행중
한은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국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에 대해선 적극 공감하고 있고, 한은은 어느 기업이나 기관보다 먼저 디지털 화폐 도입을 위한 준비를 해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은 스마트 계약을 활용한 다양한 조건부 결제와 자동정산 등 특화된 지급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다”며 “특히 대금 지급 조건의 프로그래밍 기능이 가장 중요한 혁신”이라고 봤다. 미국에서는 화물 운송 시 위치정보시스템(GPS)를 ‘예금토큰’에 연동해 화물트럭이 배달 목적지에 도착하면 별도의 비용 청구 없이도 화물운임이 지급되도록 하는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됐다.
한은이 시중은행과 함께 올해 4~6월 진행한 ‘프로젝트 한강’에서 실험한 정부·지자체 바우처 제도 역시 스마트 계약의 대표적인 사례다. 바우처의 지출 목적에 맞게 예금토큰에사용처와 한도 등 다양한 지급 조건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식이다. 이 기능은 정부의 국고보조금 지급에도 활용될 예정이다. 화폐에 프로그램을 함으로써 중복지원 등에 따른 세금 누수를 막고 정부 지원금이 원래 목표대로 사용됐는지를 추적할 수도 있다.
이 국장은 “디지털 화폐의 혁신 가능성 측면에서 보면 은행 예금을 기반으로 한 예금토큰으로 화폐의 사용조건을 입력하는 것의 사용성을 입증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것도 충분하다”며 “국내에서 토큰 증권 등 디지털 자산에 관한 법제화 논의보다 지급수단 역할을 하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먼저, 그리고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쉽다”라고 했다. 안전수칙 마련도 없이 놀이기구부터 돌려야 한다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다.
그는 “예금토큰은 스테이블코인과 병존·경쟁할 수 있고, 스테이블코인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제고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며,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 중 일정 비율을 예금토큰으로 설정해 이용자의 상환 요구에 빠르고 안정적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국장은 “예금 토큰도 스테이블코인의 일종이다. 기술적 특성은 다 같고 발행자가 은행이고 준비 자산이 예금이라는 차이밖에 없다”며 “초기에는 국내 규제를 준수하면서 안전하게 디지털 혁신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위한 대안으로 은행 중심의 예금토큰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테이블코인은 은행권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발행을 허용하면서, 비은행이 은행 중심 컨소시엄에 참여함으로써 비은행의 혁신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에금토큰(deposit token): 시중은행이 예금에 근거해 발행하는 토큰화된 디지털 자산이다. 즉, 은행 예금을 블록체인 등 분산원장 기반의 ‘토큰(token)’ 형태로 만들어, 실시간 결제·이체·자동화된 금융거래(스마트 계약) 등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디지털 화폐다. 중앙은행의 블록체인 네크워크에서 발행·유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