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섰다. 최근 며칠간 이어진 반등에 따른 피로감과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지면서 하방 압력이 강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0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0.47달러(0.73%) 떨어진 64.0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직전까지 3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며 4% 가까이 오르던 흐름이 꺾인 셈이다.
최근 유가 반등을 이끌었던 주요 요인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 공급 불안이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서부 지역의 정유시설과 항구를 잇달아 공격하면서 러시아산 원유 생산과 수출 차질 우려가 부각됐다. 러시아 국영 공유업체 트란스네프트는 전날 “정유소와 항만이 드론 공습 피해를 보면서 일부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9%를 차지하는 핵심 산유국이어서 시장은 즉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제로 이번 공습 이후 단기적인 공급 차질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유가는 배럴당 65달러 선을 위협하며 3거래일 연속 상승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유가는 되레 약세로 돌아섰다. 전문가들은 최근 급등에 따른 차익 실현 욕구가 매도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한다. PVM의 존 에반스 애널리스트는 “러시아 에너지 인프라가 입은 피해가 단기적이라는 점이 확인되면 유가는 다시 5달러 가까이 밀릴 수 있다”며 “배럴당 60달러 초반대까지 조정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에 대한 서방 제재가 교착 상태를 이어가고 있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가 주도하는 OPEC+의 증산 가능성이 부각되는 만큼 겨울철 난방 수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유가 반등 동력이 제한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관련 재고 지표도 주목받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 12일까지 일주일간 상업용 원유 재고는 928만5000배럴 급감했다. 시장 예상치였던 150만배럴 감소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표면적으로는 공급 부족 신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세부 내역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의 원유 순수입이 하루 311만배럴 줄어들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동시에 원유 수출은 하루 528만배럴로 늘어나 지난해 12월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재고 감소는 단순한 수요 급증 때문이 아니라 수출 확대와 수입 축소라는 구조적 요인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시장 참가자들은 미국의 재고 감소가 당장은 유가를 떠받치겠지만, 공급 여건이 개선되거나 글로벌 수요 둔화 조짐이 나타날 경우 하락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주요 투자은행들은 최근 경기 전망에서 세계 경제 성장세 둔화를 경고해왔다. 제조업 경기 부진, 중국 수요 회복 지연, 선진국 금리 고착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경우 원유 소비가 기대만큼 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겨울철 난방 시즌 진입을 앞두고 증류유 등 정제제품 재고가 얼마나 확보되느냐가 향후 유가 향방의 또 다른 변수로 꼽힌다. 미국과 유럽의 증류유 재고가 이미 낮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혹한이 닥칠 경우 수요 급증으로 다시 가격 반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반대로 기온이 평년 수준에 그치고 OPEC+가 실제로 증산에 나선다면 유가는 배럴당 60달러 선을 하향 돌파할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유가가 공급 불안과 차익 매도, 재고 흐름 사이에서 변동성을 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정유시설 피해가 장기화할지, 서방의 대러 제재가 강화될지, OPEC+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모두 향후 유가 흐름에 직결된다. 여기에 미국의 재고 지표와 수출입 추이가 단기 가격 방향성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