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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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어디서 살 것인가> 등 책을 썼다 하면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건축가 유현준이 최근 신작 <공간 인간>을 펴냈다. 이전 그의 책들이 건축과 도시를 공시적으로 다룬 것이었다면, 이번엔 공간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역사책'이다. 널리 알려진 세계사는 사실상 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유현준은 "세계사를 공간의 눈으로 보면 성취와 진화의 과정으로 읽힌다"며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계단 턱을 올라가는 데 도움을 준 것이 '새로운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무슨 건축가가 역사까지 이렇게 잘 아나' 싶지만, '알쓸신잡' 등 TV 방송이나 그의 유튜브 채널 '셜록현준'을 본 사람이라면 다방면에 걸친 그의 식견과 입담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물리학에 대한 그의 애정까지도. 그를 서울 논현동 유현준건축사사무소에서 만났다.

▷얼핏 봐도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하며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건축가와 대학교수라는 본업 외에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업로드하는 개인 유튜브 채널('셜록현준')과 현재 방영 중인 TV 방송 '알쓸별잡' 촬영까지. 이런 가운데 책을 또 출간했습니다. 이번 책은 쓰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공간 인간>은 8년 전쯤 구상했던 책이에요. 그때부터 틀은 짜놓고 집중적으로 쓴 건 1년 정도 된 것 같아요. 2018년 <어디서 살 것인가>를 내고 난 뒤 통시적으로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이전 책에서도 도시나 건축을 설명하면서 역사 이야기를 중간에 곁들이곤 했지만, 독자들이 그 부분엔 관심을 많이 안 가지시더라고요. 역사를 좀 알아야 현대를 이해하기 더 쉬워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3층은 2층을 짓기 전에 못 짓고, 2층은 1층 위에 지어야 하듯 역사적 사건도 그 앞뒤 어떤 시퀀스에 있느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죠. 오늘날의 스마트시티를 이해하려면 수천 년 전 선조가 했던 일을 이해해야 하는 거죠. 이런 부분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역사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으로 엮어서 풀어보고 싶었어요."

▷이 책의 제목 '공간 인간'은 라틴어 '호모 스파티움'을 번역한 것이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공간을 잘 이용해서 발전하고 진화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호모 스파티움'이라는 별칭을 제안한 건데요.

"'호모 스파티움'이란 말은 제가 만들어 본 거예요. 제 나름대로 인간에 대한 해석을 담은 거죠. '호모' 뒤에 라틴어로 많이 붙여 쓰잖아요. 공간이 라틴어로 '스파티움(spatium)'이길래 써봤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 유독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연도 확인하는 게 되게 어려웠어요. 역사학자들의 연도라는 게 고대로 갈수록 1000~2000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학자들에 따라 주장하고 해석하는 바가 다르고, 또 새로운 유적이라도 발견되면 확 바뀌기도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역사학자들끼리 다투는 부분이 있고, 건축학자가 보는 관점이 또 다른 것들도 있었어요. 숫자 검토하는 건 제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어서 책 편집자님이 엄청나게 고생하셨죠."

▷책을 부지런히 내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10여권을 썼는데요. 특히 2015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후부턴 평균 2년꼴로 신간을 내고 있습니다. 책은 왜 이렇게 많이 쓰나요?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사실 저는 진짜 글을 안 쓰던 사람이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그림만 그렸는데, 저도 신기해요. 책은 칼럼을 쓰면서 펴내게 됐어요. 칼럼은 돈이 없을 때 원고료를 벌려고 쓰기 시작했고요. 그런데 글을 써보니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건축은 너무 많은 제약이 있잖아요. 건축주부터 심의위원회, 허가권자, 공사비 등 각종 제약을 극복해 나가면서 해야 하니 제가 원하는 만큼 다 표현을 못 하는 것들이 있어요. 반면 책은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더라고요. 논문만 해도 심사위원이 있는데, 책은 제가 뭐라고 써도 아무도 말 안 하거든요. 제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책이라는 공간이더라고요. 문자와 노트북만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글 쓰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은데, 책 쓰는 과정을 즐기나 봅니다.

"즐겁게 씁니다. 저는 본업이 아니라 그런 것 같아요. 본업은 건축이니까 건축에서 할 때 받는 스트레스를 글로 푸는 거죠. '내가 하려는 건 이런 거였어'라고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거죠. 공간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니까."

▷책 읽는 루틴은 평소에 어떤가요.

"그냥 짬이 날 때, 컨디션 좋을 때 봅니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엔 안 읽어요. 뭔가 내 뇌가 배고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읽습니다. 그럴 때 막 몰아서 보는 편이에요. 매일 읽지도 않고, 일주일 내내 안 읽을 때도 있어요. 집어 든 책은 중간에 재미가 없거나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더라도 일단 끝까지 다 읽습니다. 저와의 약속 같은 것이랄까요. 1년 기준으론 15~20권 정도 읽는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에서도 종종 책 소개를 하시던데요. 그럴 때 선정 기준은 뭔가요?

"사실 책 소개는 잘 안 하려고 해요. 책 얘기는 저보다 잘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책에 나온 얘기는 결국 다른 사람의 지식인 건데, 그걸 단순하게 내 것인 양 떠드는 게 좀 싫어서요. 내가 좀 어려운 책 읽었다고 소개하면 너무 똑똑한 척하는 것 같잖아요. 다른 사람이 한 얘기를 유식한 척하면서 말하는 건 별로라 잘 안 하려고 하는데, 가끔 소개하는 책은 제 생각에 크게 영향을 줘서 저를 바뀌게 만든 책이에요. 단순히 지식만 준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친 것이죠. 그런 책이라면 제 얘기를 곁들여 할 수 있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평소엔 어떤 책을 즐겨 보나요?

"문학은 거의 안 보고 비문학 위주로 봅니다. 현대물리학 책 무척 좋아하고요. 또 지정학, 지리 관련 책도 좋아합니다. 20~30대엔 심리학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덜 읽는 것 같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종류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만의 관점으로 뭔가 새롭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런 걸 제가 동경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충격적으로 읽었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를 비롯해 <시간의 역사>, <총, 균, 쇠>, <사피엔스> 같은 책이요. 저는 건축가니까 공간을 중심으로 남들이 다 아는 얘기를 다른 각도에서 풀어서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하죠."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은 방송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건가요?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저는 철학을 별로 안 좋아해요. 증명도 안 되는 걸 말로 설명하는 것 같달까요.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빌드업된 컨텍스트에서 얘기를 하는 것일 텐데, 저는 그렇게 밑에서부터 쌓아 올린 기초가 없으니 이해도 잘 안되고 그렇더라고요. 반면 물리학자들은 굉장히 새로운 생각을 하는데 그걸 증명까지 해내잖아요. 그 어떤 분야보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론 물리학자 같은데 말이죠. 저는 그게 너무 존경스러운 거예요. 건축가도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하되 말만 해선 안 되고, 건물로 지어 증명하는 거거든요. 물리학자들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에요. 이 책을 보면 물리학자들이 하는 얘기가 동양 사상하고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수학적 언어를 통해 다른 분야와도 서로 통하는 얘기를 하는 거죠. '다른 분야의 지식을 건축적인 생각, 스트럭처 구성 등에 적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줬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과학책을 어려서부터 많이 봤던 것 같네요."

▷어려서라고 하면 언제쯤인가요?

"대학교, 대학원 때요. 저한테 그 책도 선물해주고 과학의 세계를 열어줬던 고등학교 때 친구가 한 명 있어요. 물리학과에 진학해 양자 컴퓨터 회사도 창업한 친구인데요. 그 친구랑 물리학 얘기할 때 늘 흥미로웠거든요. 지금은 좀 한물갔지만 1990년대엔 '초끈 이론'이 엄청나게 핫한 주제여서 책을 찾아봤는데, 대부분 수학이 잔뜩 적힌 것들밖에 없었어요.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같은 책은 그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쉽게 상대성 이론부터 양자역학, 초끈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놨던 책이었죠. 수학을 모르는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요. 제가 좋아하는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카쿠 같은 분들은 '지식소매상'이 아닌 현장에서 진짜 프런티어로 일하면서 대중 과학서도 잘 쓰잖아요. 그런 책을 좋아합니다. 그분들의 글을 읽으며 저는 약간의 지식 부스러기를 좀 얻는 거죠."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평소 책을 고르는 기준은 어떤가요?

"서로 다른 분야를 융합시키는 책에 항상 관심이 가요. 최근엔 양자역학과 생물학을 연결한 양자 생물학책을 읽었는데 흥미로웠어요. 지금 읽고 있는 건 <지능의 역사>란 책인데요. 지능을 빅 히스토리로 보면서 생물 진화부터 현재의 인공지능 연구까지 연결해 보는 관점이 담겨 있어 재밌습니다."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저는 약간 난독증이 있는 것 같아요. 책을 남들보다 두세 배는 천천히 읽고 다른 생각들도 자꾸 끼어들어서, 확실히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 같아요. 그림이나 장면을 통해 정보를 캐치하는 건 빠른데, 문장을 읽거나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려요. 문자라는 상징적 기호를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데 프로세스가 몇 단계 걸리는 느낌이랄까요. 텍스트로 정보를 빨리 흡수하는 게 쉽지 않은 사람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딱 있었어요. 처음으로 '책이 재밌네'라고 느꼈던 기억이 선명해요. 당시 초등학생들이 많이 봤던 추리물 중에 <소년탐정 칼레>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읽고 '책도 재밌네'라 느꼈어요. 그러면서 셜록 홈즈 시리즈 같은 걸 읽기 시작했죠. 그맘때쯤 <소공자>를 읽으면서 무척 행복한 감정에 빠졌던 기억도 나네요. 어머니가 수첩을 하나 주시곤 읽은 책 목록을 써보라 하셨거든요. 그걸 채워가는 재미를 느꼈죠.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어판을 팔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 하면서 그걸 또 막 읽었던 기억도 나요. 서점 주인이 '네가 읽기에는 좀 어려운 책이지 않니' 묻기도 했는데 그러면 더 으쓱해서 샀던 것도 같아요.

아시겠지만 중고등학생 때 우리는 학교 공부 따라 하기도 바쁘잖아요. 따로 책을 읽을 시간은 거의 없었죠. 대학에 입학한 다음엔 '이제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학력고사 끝나고 합격자 발표 난 다음에 서점에 갔어요. 첫 번째로 제가 사서 읽었던 책은 <데미안>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을 시작으로 대학생 때부터 번호를 매겨가며 책을 읽기 시작했죠."

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번호를 매겨가며 읽은 건 어떤 독서 목표치가 있어서 그랬던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제가 그림과 건축 설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과물로 남는다는 점 때문이거든요. 책도 축적되는 게 보이는 게 좋아요. 읽고 내 머릿속에만 남는 건 좀 허무해서 반드시 책을 사서 보관하거든요. 사서 읽고 책꽂이에 꽂아야 돼요. 읽은 순서대로 꽂아 놓죠."

▷책을 읽은 순서대로 꽂아 놓으면 나중에 다시 찾기 힘들지 않나요?

"아니죠. 오히려 너무 기억이 잘 나죠. 표지 사진과 함께 읽은 날짜를 적어서 클라우드에 저장해 놓는 거예요. 읽은 순서대로 넘버링을 해놓으면 오히려 몇 번째 책인지 찾기 편해요."

▷그러면 아직 안 읽은 책은 어디에 두나요? 선물 받거나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책들도 꽤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읽기 전에 책을 미리 사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딱 읽을 책만 사서 바로 봐요. 그래서 책 선물 받는 것도 썩 좋아하진 않아요. 한 번에 딱 한 권만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숙제를 주면 부담스럽더라고요. 제가 읽은 책 외에는 다른 공간에 방치해둬요."

▷읽은 책만 꽂혀 있다면 책장을 보는 재미가 있겠네요. 시간에 따라 읽은 책을 쭉 알 수 있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제 책장이 DNA 지도, 게놈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내 생각이 이렇게 흘렀구나. 이 당시에는 뭐에 관심이 많았고 이때는 어떤 책을 많이 읽었구나, 흐름이 읽히죠. 책장만 봐도 어떤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생각이 어떻게 진화해 나갔는지 알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저는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렇게 읽고 꽂은 책은 절대 버리지도 않아요. 살 때 심사숙고해 고른 책이니까요. 밑줄 긋고 메모하며 읽기 때문에 남한테 잘 빌려주지도 않죠. 말하자면 책은 저한텐 일기 같은 거예요."

▷소설을 거의 안 읽는다고 했는데, '2023년 9월 24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등 읽은 책 목록에 소설이 좀 보이긴 하네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읽어요. 초현실적이면서 공간이 항상 개입되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요. 특히 <일각수의 꿈>(원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읽고 너무 쇼킹해서 그다음부터는 하루키 신간이 나오면 거의 사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가상 공간'에 꽂혀 있었거든요. 현대인의 사회란 것이 현실 공간에선 건물을 막 지어대는데, 가상 공간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생긴 거잖아요. 인간은 그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요. <일각수의 꿈>을 보면 두 개의 스토리가 평행해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가선 서로 다른 세상이 딱 만나잖아요. 두 개의 다른 세상이 하나로 합쳐지는데, 그게 현대인이 사는 공간하고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막 나오지만, 두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잖아요. 그게 저한테는 정말 무슨 생각의 방아쇠를 당긴 것 같은 느낌이었죠."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다른 소설도 읽은 게 있나요?

"최근 읽었던 것 중엔 <스토너>가 무척 좋았습니다.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등도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건축가 이야기에요. 건축 설계사무소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저자가 건축을 잘 아는 것 같아요. 인간의 미묘한 감정, 무의식 등이 표현이 잘 돼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건축가로서 건축 책에서 받은 영향도 있나요?

"저는 건축 책은 안 읽어요. 대학생 때부터 세운 원칙 중 하나가 '건축 책은 읽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건축 책을 읽으면 나는 저자의 아류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원전이 되는 책을 읽으면 몰라도 참고서만 계속 봐서 기존 건축가를 어떻게 뛰어넘겠어요? '건축'이라고 하는 문제를 내가 풀 때 그 문제의 답은 건축 분야에서 있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는 쪽이에요. 물에 빠진 사람은 물 바깥에 있는 사람이 건져줘야지, 물에 빠진 사람끼리 건진다고 뭐 되겠어요? 그래서 정했던 원칙이 '나는 건축 책은 안 읽는다'였죠. 건축에 관련된 책은 지금까지 다 합쳐도 열 권이나 읽었을라나요. 그마저도 학교 다닐 때 강의를 듣기 위해 필요한 책 제외하면, 진짜 꼭 읽어봐야 해서 읽은 책 대여섯 권 정도밖에 안 본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건축가들이 하는 얘기도 잘 안 들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죠."

▷건축 영감은 물리학책에서 많이 받나 보군요.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제 건축에 엄청난 영감을 줬던 책이라면, 미치오 카쿠의 <초공간>은 건축뿐만 아니라 저의 종교관 등 삶에 두루 영향을 많이 끼친 책이죠. 이 책도 평행우주, 시간 왜곡, 10차원 세계 등을 다루고 있어요. '초공간', '초끈 이론'이라고 하면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과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한 차원 위에서 통합하면 하나로 풀릴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건축할 때도 사람들이 갈등하는 요소들이 많아요. 대개 갈등은 '제로섬'으로 보고 한쪽이 죽어야 내가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저같이 창작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한 차원 위의 솔루션을 찾아내면 둘 다 화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게 건축의 핵심이거든요. <공간 인간> 역시 그런 고차원적인 솔루션으로 사회 통합을 이뤄나간 사람들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고요. 이런 것들도 사실은 그 책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외 추천 책을 몇 권 꼽아주세요.

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건축가 유현준이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1.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지리적 조건이 역사를 결정한다.

2. <시간의 역사> | 스티븐 호킹-말 그대로 시간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3.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정말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을 '문화적 한계'란 측면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4. <파운틴헤드> | 아인 랜드-사람의 가면을 벗겨주는 통찰력 있는 책. 좋은 가면을 쓰고 권력을 쟁취하는 'Anti-leader'의 민낯을 잘 그렸다.

5. <늦어서 고마워> | 토머스 프리드먼-현대 사회의 SNS 세상 문제를 다뤘다. 온라인 공간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결국 오프라인 공간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하게 해준 책.

6.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인간에 대해 표피를 뚫고 밑까지 파고 들어간다.

7. <불확실성의 시대> | 토비아스 휘터-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 생각의 껍데기를 깨기 위해서 엄청나게 치열하게, 또 매너 있게 싸운다. 사회적 한계,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헤쳐 나가는 위대한 인간의 지성.

8. <코드 그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 토머스 L. 프리드먼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9. <돈의 심리학> | 모건 하우절-아들에게도 사준 책. 돈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돈을 내 인생에 도움이 되게 다루는 데 꼭 필요한 지침서. 30대 젊은 저자의 통찰이 놀랍다.

■ 건축가 유현준의 추천 책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유현준 "건축 영감은 건축책이 아닌 물리학책에서 받아요" [설지연의 독설(讀說)]

'독설(讀說)'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보는 연재 코너입니다.

글=설지연/사진=임형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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