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對中 실리외교? 필리핀 두테르테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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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 칼럼] 對中 실리외교? 필리핀 두테르테를 보라

중국과 해상 영토 분쟁의 교과서 같은 나라가 필리핀이다. 벤치마킹은 물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중국은 1994년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의 미스치프 리프(암초)를 우기에 필리핀 해군이 일시적으로 근무를 중단한 틈을 타 무력 점거했다. 필리핀 팔라완섬에서 250㎞, 중국 하이난섬에서 500㎞ 떨어진 곳으로, 엄연히 필리핀의 200해리(370.4㎞) 배타적경제수역(EEZ) 내에 있다. 중국은 장제스 국민당 시절 11단선에서 파생한 것으로, 남중국해의 90%가 중국 영해라는 U자 형태의 9단선 지도를 근거로 들이댔다. 필리핀은 군사 행동과 외교를 병행하는 이중 접근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스치프 리프에서 37㎞ 떨어진 모래톱에 폐군함을 고의로 좌초시킨 뒤 시멘트와 철강, 케이블 등으로 고착해 해병대원들을 상주시켰다. 비례 원칙에 따른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2014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 때 이 문제를 헤이그의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로 끌고 갔다. 2016년 7월 판결은 필리핀의 완승이었다. 중국이 주장한 9단선 등 모든 역사적 근거를 포함해 행위의 합법성이 일절 인정되지 않았다. 필리핀은 중국과의 분쟁에서 결정적 호기를 잡았으나, 이후 사태는 한 지도자의 영향으로 정반대로 흘러갔다. 학생 운동가 출신 반미 좌파 정치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장본인이다.

PCA 판결과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두테르테의 첫 방문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지옥에나 가라”고 욕설을 퍼붓던 두테르테는 중국에 가서는 “중국인의 핏줄을 타고났다”며 비위를 맞췄다. 중국도 미국 대통령급에 준하는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다. 두테르테는 중국에서 240억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약속을 받았다. 대신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아예 의제로 삼지 않았다. 향후에도 다른 국가를 빼고 두 나라만 얘기하자는 중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

필리핀과 중국의 밀월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필리핀이 분쟁해역에서 석유 시추를 추진하자 시진핑 주석은 두테르테 면전에서 “남중국해를 건드리면 전쟁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겁박했다. 중국은 필리핀 EEZ 내 또 다른 섬 휫선 리프에 선박 220척을 대놓고 무력 탈취 시도를 했다. 중국에 뒤통수를 맞은 두테르테는 국내 반중 정서가 극에 달하자 임기 말 반중 친미로 돌아서 미국과 연합훈련을 재개했다.

미·중 사이에서 두테르테의 위험한 줄타기는 국가에 지대한 손실을 끼쳤다. 미국과 사이가 틀어진 상태에서 맞은 코로나 사태 때 백신 조달에 애로를 겪자 중국의 ‘물백신’ 시노팜이라도 받겠다고 매달리면서 그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해선 안 될 반국가적 행위를 저질렀다. 대중국 해상 전진기지인 미스치프 리프 폐군함의 시설 보수를 하지 않겠다고 밀약한 것이다. 재임 시 알려졌다면 탄핵 당했을 매국 행위다. 그렇다면 대중국 실리외교가 경제에는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중국이 필리핀에 약속한 수많은 인프라 프로젝트 중 실제로 착수한 것은 교량과 관개사업 두 건뿐이었다. 두테르테는 어쭙잖은 실리외교와 유화책으로 중국에 놀아나는 통에 중국에 맞설 해군력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중국이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 양식 어장이라는 산란 1호기를 설치한 것은 문재인 정부 때다. 문 정부가 2020년 해군을 통해 이를 확인했지만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 사드 배치 군사기밀을 중국 대사관 무관에게 사전 브리핑해준 정권인데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영토 분쟁은 초기 대응이 중요한데, 이를 방기한 탓에 사태를 더 키웠다. 중국의 의도가 명확해지고 있는 지금, 필리핀의 폐군함처럼 유사한 시설을 설치하는 비례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한·중 어업협정과 유엔 해양법 협약을 위반한 만큼 법적 조치도 병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두테르테식의 유화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도널드 트럼프발 관세전쟁의 칼날이 중국을 겨누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미·중 격돌 시기 대선 국면에서 우리는 중대한 시대적 질문에 맞닥뜨린다.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도자의 대중국관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와 손잡고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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