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한림원 회원 200명 설문조사
제안받은 123명중 52명 “수락-검토”
이탈 막기 위한 제도적 지원 필요
동아일보가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함께 한림원 회원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1.5%에 해당하는 123명이 최근 5년 이내에 해외 국가에서 영입 제안을 받은 바 있다고 답했다. 제안을 받은 응답자 중 42%(52명)는 제안을 수락해 해외에서 연구 중이거나 제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안을 받지 않은 77명도 83%(64명)는 제안이 들어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과학계 석학들의 두뇌 유출이 한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영입을 제안한 국가를 보면 응답자 중 82.9%가 중국에서 제안을 받았으며 미국이 26.8%, 싱가포르가 10.6%로 뒤를 이었다(복수 응답). 영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요인으로는 54세 이하의 젊은 과학자들은 ‘영입 기관이 제안한 고용 조건’을, 55세 이상은 ‘국내 석학 활용 제도 부재’를 1순위로 꼽았다. 정년 이후에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지원이 없다는 뜻이다.
은퇴후에도 연구지원 한다더니… 화학과 교수를 교무처 배정
[과학기술 인재 엑소더스] 〈상〉 한국 떠나는 이공계 석학들
이름만 ‘명예교수’, 연구실도 없어… 임차료-연구원 월급 직접 충당해야
“3년간 200억 보장 제안 받아봐… 혹하는 감정 함께 좌절감 밀려와”
석학 1명 유출, 작은 연구소 떠나는 격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로 일하던 A 씨(68)는 최근 정년을 채우고 2023년부터 ‘명예특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대학 측이 은퇴 후에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자리다. 그런데 명칭만 그럴듯하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우선 연구 공간과 재원 문제 때문에 본래 전공이던 화학과가 아닌 교무처 소속으로 바뀌었다. 연구실도 제공되지 않았고 학생 선발도 불가능해 교수가 개인적으로 확보한 연구비 내에서 임차료와 박사후연구원의 인건비를 충당해야 한다. A 씨는 “이름만 명예교수지 아무 지원도 없다”며 “6∼7년 전 중국에서 영입 제안이 왔을 때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지금도 든다”고 털어놨다.국내 이공계 석학들의 두뇌 유출은 이처럼 국내에서 연구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다는 불안감도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과학자에 대한 낮은 처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들을 ‘한국 탈출’이라는 막다른 선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본보가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공동으로 회원 200명을 설문한 결과 80%가량은 “한국의 두뇌 유출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답했다.● 수십억 연구비 보장, 자녀 학비 지원 등 파격 제안
국내 출연연 실장급 연구원은 “최근 중국에서 아마존급 연봉을 주겠다고 제안이 왔을 때 자녀 교육 문제 등 가족 이슈가 없었다면 솔직히 갔을 것”이라며 “이런 연봉을 제시받으면 혹하는 감정과 함께 좌절감이 몰려온다”고 했다. 해외 이주를 망설이는 석학들에게 자녀 국제학교 등록금이나 주거 비용 등 추가 지원을 제시하는 경우도 잦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R&D 예산과 불필요한 행정 규제도 젊은 과학자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국립대 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40대 교수 B 씨는 얼마 전 유럽 대학으로 이직했다. B 씨의 사정을 아는 한 교수는 “연구비를 따기 위해 써야 하는 제안서, 또 성과 보고서 등을 작성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드는 것을 항상 답답해했다”며 “이런 번거로운 절차들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 “석학 1명 유출은 ‘작은 연구소’ 통째로 떠나는 셈”
연구 역량과 노하우, 학계 네트워크를 쌓은 국내 석학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국내 과학계에는 뼈아픈 타격이다. 특정 분야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연구진을 구성하고, 학계 네트워크를 구축해 공동 연구를 해 나가는 전 과정을 통째로 빼앗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김윤영 숙명여대 석좌교수는 “일부 교수들의 경우 함께 연구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는데, 인재를 영입하는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며 “석학 한 명을 영입해서 작은 연구소를 단기간에 구축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타국으로 옮겨간 국내 과학자가 이뤄낸 과학 성과는 오롯이 그 나라의 것이 된다. 정진호 과기한림원장은 “중국의 영입 조건을 보면 연구비를 대규모로 지원해 주는 대신 연구에 따른 특허는 중국에 귀속된다는 내용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고 했다.
최지원 기자 jwchoi@donga.com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