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창의와 혁신] 〈58〉기술혁신을 위한 언어 사용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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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어느 작은 기업은 대학생을 상대로 검색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갖고 싶어 10의 100제곱의 숫자를 뜻하는 구골(googol)을 회사명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상표 '구골'이 등록돼 있었기에 비슷한 느낌의 '구글(google)'을 골랐다. 현재 숫자 구골을 몰라도 기업 구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숫자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등 계산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 상거래에서 시작해 산업과 시장을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켰다. 단순히 순번을 매길 때도 쓰고, 스포츠, 학업, 기업의 성과 또는 우열을 가릴 때도 쓴다. 이진법은 전자회로에 전류가 통하는지에 따라 1과 0으로 처리, 계산함으로써 컴퓨터 활용을 촉진했다. 1과 0의 양자 중첩과 얽힘을 활용한 양자컴퓨팅도 숫자에 빚이 있다.

'숫자'는 기술혁신에서 어떤 의미일까. 18세기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뒤쳐진 국가였다. 목축을 통해 생산한 양털을 유럽에 수출했지만 정작 양털로 만든 모직물을 유럽에서 수입했다. 고민 끝에 네덜란드에서 박해받던 신교도 기술자와 금융업자를 적극 받아들였다. 기술, 금융과 정책의 결합은 방적기, 증기기관, 제철, 철도, 통신 등 발명과 혁신으로 이어져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궈냈다. 그 뒤 독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제조, 서비스, 정보통신 등 2차, 3차 산업혁명이 나왔다.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도 나왔다. 그러나 영국의 최초 산업혁명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내용과 가치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최초 산업혁명의 명성에 기대려고 산업혁명에 2차, 3차, 4차의 숫자를 헛되이 붙인 탓은 아닐까.

그림작가 이소연 作그림작가 이소연 作

스마트폰은 어떤가. 원래 기업은 스마트폰을 다양한 모델로 여럿 만들었다. 그 중 인기 있는 모델을 선택해 집중하고 버전업(version up)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새로운 버전을 출시할 때마다 모델명 뒤의 번호를 높여간다. 최근까지 2자리 수 이상의 버전업 모델을 내놨다. 생각해보자. 버전 12와 13은 분명 다르겠지만 어떤 차이일까. 쉽게 알기 어렵다. 번호를 높여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출시 이후 기술개발 성과를 반영한다. 경쟁자를 고려해 기능을 개선한다. 소비자 요구를 반영한다. 스마트폰 등 현대기술은 시장 출시 후에도 기술과 시장의 반응을 고려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모델이 많다. 소프트웨어, 앱스토어 등 운용시스템 개선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한다. 버전업은 기존의 성과와 경험을 활용하므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최초 모델을 뛰어넘을 혁신이 없었기에 버전업에 그친 것은 아닐까. 약간의 변화만 주어 버전업 모델로 내놓고 고객의 구매충동을 끌어내는 마케팅 기법은 아닐까. 혁신적인 도전이 실패할까봐 옛 모델의 명성에 기댄 것은 아닐까. 물론 버전업 모델의 수익으로 신규 투자에 나선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숫자의 버전업을 넘어 스마트폰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최초' 모델을 기대해 본다.

웹1.0은 인터넷에서 공급자가 제공한 정보를 읽을 수만 있는 구조였다. 웹2.0은 읽기에 쓰기 등을 더해 이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끌어냈다. 웹3.0은 무엇인가. 블록체인, 암호화폐 등 웹 구조에 민주적 절차와 참여자 기여에 대한 보상을 도입했다. 그런데도 웹3.0이 크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정부규제도 문제지만 숫자만 3.0으로 버전업에 그친 탓이다. 기존 웹의 벽을 넘지 못한 '소심한 개선'에 불과해 세상을 끌어들이기에 역부족이었던 때문은 아닐까.

갈수록 '무'에서 '유'를 만드는 기술을 보기 어렵다. '유'에서 조금 다른 '유'를 만들고 대단한 것처럼 떠들어댄다. 기존 버전의 숫자나 레벨을 높여가며 거품을 만들고 고객을 유인해 단기적인 성과 내기에 급급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불을 붙인 경제전쟁과 경기침체를 극복할 상품을 만들려면 숫자 장난, 허세, 모방과 단순 추격을 버려야 한다. '강력한 최초'를 만드는 목표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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