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해졌다 싶으면 또 터져 나온다. 순번이라도 정한 것처럼 돌아가면서 사고가 발생한다. 부당 대출부터 횡령, 이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것까지 사고 내용도 다채롭다. 갈수록 대범해지고 액수도 늘어나는 은행권의 금융사고 얘기다.
최근 한 국책 은행에선 전·현직 직원 수십 명이 연루된 대형 사고가 적발됐다. 14년간 몸담고 퇴직한 직원이 은행에 근무 중인 배우자와 입사 동기, 선후배 직원 28명과 짜고 무려 7년 동안 880억원을 부당 대출했다. 은행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작년에야 자체 조사를 통해 확인했는데 금융감독원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올해 초엔 시중은행 3곳에서 고위 임원부터 일선 영업점 직원까지 가담한 3800억원대 부당 대출이 적발되기도 했다. 사고 금액도 해마다 치솟고 있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5개 은행에서 터진 횡령, 유용, 배임 등 금융사고 금액은 1877억원에 달했다. 2020년 68억원에서 30배가량 늘어난 액수다. 이쯤 되면 은행이 아니라 ‘사금고’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다.
은행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장으로 꼽힌다. 뭐니뭐니 해도 다른 업종보다 보수가 높은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 직원의 작년 1인당 평균 연봉은 1억1840만원에 달했다. 신입 행원 초봉은 7000만원 안팎이다. 정년 전에 희망퇴직을 하는 직원에겐 많게는 7억원대 퇴직금도 지급한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은행권의 임금은 제조업 등 다른 업종보다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대신 은행들은 직원이 대출을 성사시키면 리베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임금을 보전해줬다. 예컨대 1000만원을 대출하면 3~5%를 리베이트로 챙겼다. 이런 관행을 바꾼 건 신한은행이었다. 이른바 ‘찾아가는 영업’을 통해 리베이트를 없애고 다른 은행보다 많은 급여를 주면서 변화를 이끌었다. 이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통합 국민은행의 초대 은행장을 맡은 김정태 행장이 리베이트 관행을 폐지하는 대신 임금을 대폭 상향 조정하면서 다른 은행들도 뒤따랐다. 당시 김 행장은 “돈을 다루는 은행원이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업종보다 임금을 많이 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융사고가 갈수록 대형화·조직화하면서 김 행장의 공언은 공염불이 됐다. 전문가들은 내부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사고 예방을 위해 은행들도 순환근무와 명령휴가 실시, 고위험 업무의 직무 분리, 결재단계별 검증체계 강화 등의 조치를 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역부족이란 지적이 많다. 결국 최고경영진이 실질적 책임을 져야 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실무자가 아니라 경영진에 물어야 한다. 경영진도 직을 걸고 더욱 강력한 내부통제에 나서야 한다. 금융당국은 내부통제에 대한 경영진의 책임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땐 제재를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은행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해왔다. 올해도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역대 최대 이익을 갈아치울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이 이자 장사를 바탕으로 ‘돈잔치’를 벌이는 동안 다수의 국민과 기업은 고금리로 신음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은행권에 전례 없는 압박이 몰아칠 것이다. 은행의 생명은 고객의 신뢰와 리스크 관리다. 이 두 축이 무너지면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금융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