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와 종족 간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사람을 한 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헤어져도 적이 되지 말아라.”
능성 구씨가 터를 잡은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의 ‘모춘당(暮春堂)’ 기둥에는 선대부터 전해오는 가훈이 새겨져 있다. 승산마을은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과 2대 구자경 회장, 3대 구본무 회장이 나고 자란 곳이다.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구자경 회장이 복원했다. 이 가훈은 LG가의 장자 승계 전통과 동업자 허씨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인화의 모춘당 정신을 LG의 고객가치 경영과 인간 중심 경영 이념으로 발전시켜 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기업인이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이다.
지난 24일은 상남 탄생 100주년이었다.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전자와 화학산업 중심으로 LG그룹의 초석을 다진 고인의 인간애와 혜안은 4대 경영자뿐 아니라 분초를 다퉈가며 글로벌 산업 현장을 누비는 여타 기업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경영 이념 선포 2주년을 맞아 1992년 펴낸 회고록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담긴 고객 가치와 인재 육성을 향한 천착은 30여 년이 지난 요즘 경영인들도 새길 만한 가르침이다.
여러 성과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업적은 ‘잡음 없는 경영 승계’를 꼽을 수 있다. 1995년 구 명예회장은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70세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 경영을 넘겼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선대 회장의 자발적 퇴진이었기에, 당시 한국 재계에서는 보기 드문 ‘무고(無苦)승계’ 사례로 회자했다. 2·3세 간 경영권 분쟁이 다반사인 요즘 세태에 견줘보면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본인의 사퇴와 함께 구씨와 허씨 양가의 창업세대 인사들의 동반 퇴진을 통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그는 생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양가 모두 아들만 많이 낳아서 정리하는 데 골치가 아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70년 본인이 당숙 숙부 등을 제치고 회장직에 올랐던 것처럼 ‘장자 승계 원칙’을 후대에 더욱 확고히 세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충남 성환의 연암축산원예대학 사택에 기거하며 버섯을 재배하고 메주를 띄우며 농부처럼 살았다.
3대 70년간 잡음 없는 승계로 재계의 모범이 돼온 LG가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구본무 회장 작고 5년째인 2023년 2월 김영식 여사와 연경·연수 자매가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상속회복 청구소송은 재계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당혹스러운 소식이었다. 유언장 존재 여부와 법정 상속분대로 유산을 다시 분할해야 한다는 게 소송의 요지인데, 지난 2년간 네 번의 변론준비기일이 열렸을 뿐 본격적인 변론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인화’의 LG가에서 벌어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라 더욱 씁쓸하다.
1947년 포목점에서 출발한 LG그룹이 자산 178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는 구 명예회장이 그토록 강조한 ‘고객’, 즉 국민을 항상 염두에 둔 경영철학의 힘이 컸다. LG가의 가족 간 소송은 힘겹게 쌓아온 인화의 유산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이은 미·중 간 패권 경쟁, 도널드 트럼프발 관세폭탄 등 유례없는 경영 환경의 격변 와중에 전개되고 있는 가족 간 소송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양측이 소송까지 가는 과정에서 신뢰 상실과 적잖은 감정의 앙금이 쌓였을 것이다. 상남 탄생 100주년을 맞아 ‘형제 종족 간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말라’는 가훈을 되새기는 데서 해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